a.건축에서 많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표현이 혼란스럽다는 신호지만,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강한 아이디어는 질서와 통제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1
b.모든 쓸모없고 가여운 물건들, 안타까운 형태들, 과거의 망령이 되어버린 기구들, 방황하는 기능들. 비합리적인 기능들에 작별을 고한, 더이상 발탁되지 않는 사물들. 그리하여 떠오르는 비생산적이며 과잉된 잉여 속의 발견들
c.영원한 것은 고고학에서 연구되는 도시의 흔적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의 주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근간은 폼페이의 전형적인 로마주택이다. 지금으로부터 만 년 후 인류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때, 고고학은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줄 것이다. 가장 많은 인구를 수용했던 건축 유형이 증거가 되어 우리의 문화를 나타낼 것이다. 왜 그렇게 엄청난 크기의 빌딩이 필요했었는지의 이유를 말이다. 우리는 미래의 역사를 미리 쓰기 위해서 더 많은 건축사례가 필요하다...외계인: 어느 쪽이 건축이야? 이쪽? 저쪽? (건축학계에서 논의되었던 주요한 형태적 개념과 건축유형의 대표적 고고학적 발견물의 비교사례를 가리키며)2
d.그러나 쓰임새라는 즉물적 차원을 초월하는 이 탑의 미학적 상징적 기능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_미헐 데 클레르크Michel de Klerk3
e.문학은 더 이상 세계의 재현과 모방인 미메시스(Mimesis)도, 세계의 인지 수단인 마테시스(Mathesis)도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언어의 불가능한 모험인 세미오시스(Semiosis), 즉 텍스트가 될 수 밖에 없다....소쉬르로 대표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작품(oeuvre)은 단일하고도 안정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texte)이다. 텍스트는 작품의 분해가 아니며, 텍스트의 상상적인 꼬리가 바로 작품이다. 혹은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텍스트는 결코 멈출 수 없다. 텍스트의 구성 운동은 횡단(traversee)이다. 특히 그것은 작품을, 여러 작품들을 관통할 수 있다. 텍스트는 언술행위의 규칙들(합리적인 것, 읽혀질 수 있는 것)의 한계까지 나아간다…텍스트는 정확히 일반 견해(doxa)의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언제나 반론적인(paradoxal), 즉 일반 견해 밖에 있는 것이다4
f.단순히 사물의 물리적인 재현mimesis은 누군가 잊지않고 재현했다는 그 사실 자체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반면 미니멀건축은 재현하지 않고자하는 집착을 통해 마침내 재현하지 않음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g.눈에 보이는 논리가 그 구조의 실제 비헤이비어(behavior)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얘기, 그런 게 미스를 근거리에서 모시면서 내가 터득한 그런 원칙이지, 말하자면5
h.이곳저곳, 이쪽저쪽에서 들은 것들-지식인으로서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Respose라면, 그럼으로써 그에 따르는 무게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Responsability, 곧 지식인으로서 짊어질 책임감이다
i.만일 우리가 어떤 오브제가 지닌 개념을 갖지 않으면, 그 개념은 해석불가하고 “불투명”한 것이 된다...새로운 절단, 새로운 외곽선은 새로운 영역을 그려낸다6
j.초현실주의는 환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겠지만 인간성을 손상시키는 모든 모순이 마치 꿈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처럼 초현실로서 설명될 수는 있다...발견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가능성의 세계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7
k.접속하는 항이 달라지면 다른 기계가 되고 다른 욕망이 작동한다. 입이 성대와 접속하면 ‘말하는-기계’가 되고, 식도와 접촉하면 ‘먹는-기계’가 되며, 생식기와 접촉하면 ‘섹스-기계’가 되는 식이다. 모든 사진은 ‘어떤’ 사진이기에 앞서 ‘그냥’ 사진임을 말하고 싶었다8
l.예술가라면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즉 재료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작품으로 재료를 지배해야한다 9
m.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의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10
n.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불화를 외피로 삼아 뭔가를 긋고, 칠하고, 다듬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그것은 더 이상 불화가 아니게 됩니다. 결국 화면은 강박적인 꾸덕임이 지배하는 어떤 집착의 산물로 가득 차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허물(Dummy)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저는 이 그림들을 비로소 '귀불(Dummy Budda)'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11
o.인간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때 그 인간과 더불어 태어난 악한 본성을 함께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빛과 어둠이 서로를 떼어놓고는 볼 수 없는 것처럼, 돌의 충만한 상징성은 필연적으로 돌이라는 허무를 동반한다...더군다나 새가 된 돌은 전시가 끝난 뒤에도 돌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그것이 배역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돌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비밀 하나. 자세히 보면 모든 돌은 당신의 얼굴과 조금씩 닮아 있다...오늘날 예술의 본령은 어차피 좋은 붓이 되는게 아니라 캔버스의 외곽선을 지우는 지우개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12
p.
그것은 인터페이스라는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이 개념은 컴퓨터 스크린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 반경을 넓혀가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공 환경의 접촉면을 지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일상 문화와 테크놀로지 사이에서 인터페이스의 물질적 구성에 관여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재정의되고, 감각적 지각, 언어적 소통, 신체적 행위를 아우르는 당대의 경험 형식을 변형하거나 복제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입체파가 다중적인 시선으로 표면들의 관통과 접합을 표현하여 재현의 인터페이스로서의 투시도법의 유효성을 의문시했던 반면...이렇게 투시도법이 건축가의 필수 덕목이 되면서 건축은 점차 건물의 생산과 매매과정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전문 활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13-1
q.여기에서 잠시 ‘숭고 the sublime’라는 칸트의 미적 범주를 살펴보자. 기능의 범주를 발명하기 이전 초기 모더니스트들은 테크놀로지의 관계 속에서 디자인의 당대적 의미와 역할을 정의하는데 이 범주를 자주 활용하곤 했었다. 칸트에 따르면, 본래 숭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이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무기력감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우리 눈 앞에 놓인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의 감정을 유발할만큼 압도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숭고의 대상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그는 컴퓨터의 외형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물처럼 엄격한 논리를 갖춰야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폴 랜드의 로고를 디테일로 간직한 IBM의 컴퓨터들은 강철 프레임에 몸체를 지탱하고 애나멜을 입힌 금속 패널로 내부를 감추고 있었다. 커튼월 건축을 연상시키는 외형으로 인해, 사무실에 배치된 IBM 컴퓨터들은 마천루의 축소 모형처럼 연출되었다...나는 미래의 가정이 오늘날의 가정보다 과거의 가정에 보다 가깝지 않을까 예측한다. 오늘날 가정을 채우고 있는 블랙박스들은 사라질 것이며, 의자, 탁자, 침대처럼 좀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사물들이 무대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은 태곳적부터 특정한 형태로 우리와 함께 생활해왔으며, 그 기능은 나름의 본질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13-2
r. 1.진도구는 실제적인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다 2.진도구는 분명히 존재한다 3.모든 진도구는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다 4.진도구는 일상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5. 진도구는 판매를 위한 상품이 아니다 6.진도구 제작에 있어 유머 만이 유일한 동기가 아니다 7.진도구는 선전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8.진도구는 결코 금기가 아니다 9.진도구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10.진도구는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진도구는 순수외관의 반대편에서 ‘순수기능’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진도구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장 복잡하고 특수한 방식으로 필요와 기능의 인간중심적인 방정식을 내파한다...진도구의 관심사는 변신로봇이 무엇으로 변신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 변신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13-2
s.때가 되었다. 로켓들이^조준되고^달과 화성에 착륙한다^별들에^독이 뿌려질
DET ER PA TID, Rakettar stikk^snutane upp^og medar pa manen og Mars^Det er pa tid^det er pa tid^a sa si gift millom stjernone14
t.나사의 우주개발 초창기에 사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과학적 데이터와는 거리가 먼 현장 스케치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폴로계획을 통해 달에 가면서 사진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핫셀블라드에 70밀리 필름을 쓰는 특수한 카메라를 주문하는 등 사진에 정성을 쏟는다. 그러면서 이미지의 빅뱅이 제대로 일어난다. 우주인들은 이제껏 인간이 가보지 못한 곳에서, 인간이 본 적 없는 강렬한 태양 광선 아래 사진을 찍어 온다. 특히 1968년 아폴로 8호에서 찍은 최초의 지구출(earthrise), 즉 달의 지평선 너머로 지구가 떠오르는 장엄한 광경은 몇 만 년을 변함없이 일출이나 월출만 보아오던 인류에게 새로운 우주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그것이 바로 망막에 일어난 빅뱅이다15
u.그렇게 해서 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게 된 7인의 사무라이는 무언극의 배우들처럼, 뭔가 말하려는 게 없는 것 같았고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고, 말이 필요 없는 듯 아무 말도 없이, 표정도 필요 없는 듯 표정도 없이, 울음이나 웃음은 생각도 할 수도 없다는 듯이 울거나 웃지도 않고 싸웠다. 나는 오로지 싸우기 위해서 싸우는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고, 그래야만 하는지도 알 수 없고, 달리 방법이 없는지도 알 수 없는, 긴 머리를 묶고 어느 정도 사무라이 모습을 한 7인의 사무라이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낭만적인 고요한 벌판에서 뚜렷한 이유는 없이, 어쩌면 세상이 너무나 하얗다는 이유로, 서로를 칼로 베며 붉은 피를 눈 위에 멋있게 뿌리지는 않고, 여기에는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다는 듯 서로를 칼로 베는 시늉만 하며 벌이는 듯한, 흐지부지하고 지루한 싸움 같은 것을 지켜봐야 했다16
v.ENVIRONMANTAL QUESTIONS to technical experts, but approached the assignment with a particular position. in his opinion, the energy efficiency of the design should not depend on construction and building technology, but should be understood as an ARCHITECTURAL PROBLEM, an integral part of the design...this is where the architect can become inventive in his design. if he does not want to rely on the engineer alone, he has to take the intellectual initiative himself, so that the idea behind his designs becomes visi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autonomy of architecture, energy-consicious architecture is important in that it includes the possibility of new architectural concepts. specifically, it is about developing so-called “passive systems,” which include above all the question of orientation, the creation of different climatic zones in the form of buffer zones, the minimization of the outer wall surface, the use of different materials such as greenery, glass, stone and earth, and the question of the specific organization and form of the floor plans and the creative implementation of these elements in a CLIMATICALLY ADAPTIVE ARCHITECTURE17
w.종이 울렸다. 단 세번의 짧은 비명. 그 순간의 찰나에 모두가 재빠르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두세번의 눈깜빡임과 동시에 교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강박적으로 쥐어뜯은듯 머리가 헝클어지고 너저분한 선생님이 들어오고, 모두, 일동 경례! 그리곤 일제히 책을 편다.
Modern Times. 모던 타임즈
출석번호 13번이 일어나 책을 펼친다. 모두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읽는다. 우리는. 우리는! 따라 읽는다. 노동에 속박되었던 과거의 영광을, 그 위대했던 순간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몸의 기계적 반복을 더이상 부정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지나친 자유를 이제 거부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는 모였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권리를 기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제 그들은 이기적으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몸은, 더이상, 쓸모없다. 그리하여 다시 사회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노예가 될 준비를 마친 우리들은 두 팔의 병적이고 반복적인 움직임의 아름다움과 피땀의 숭고함을 17페이지 마지막 문단, 아름다운 흑백사진과 함께 배운다.
x.나는 타자의 언어를 통해 형성된 주체성을 경험하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나는 타자가 나에 대한 경험을 나에 얽힌 서사의 구조 안에 얽히고 또 내포된 경험으로서 퍼뜨리는 방식을 경험한다. 나는 타자의 세계에 특정한 방식으로 속한다. 나는 바깥에 자리 잡고 앉아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보다, 나는 타자의 경험의 구조 안에 위치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본다...GPT-3를 훈련하는 데에 쓰인 45TB 가량의 플레인 텍스트로 집약된 ‘인터넷’의 개념-이것이 바로 작품 속에서 GPT-3가 언급한 “집단 무의식 개념의 초공간적 버전”일지도 모른다...번역적 임베딩...그렇다고 해서 컴퓨터 생성 텍스트가 고질적인 번역의 문제를 동반한다는 느낌은 단순한 인간 중심적 불안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컴퓨터 생성 텍스트를 번역하는 행위는 번역 개념의 확장이지 번역 행위의 확장은 아니다. 이러한 확장은 번역하는 행위와 번역물의 지각 사이의 간극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간극의 번역의 주체와 객체가 소통하는 영역이다. 이러한 소통의 영역은 장력의 영역이자, 모순의 영역이다. 이는 번역 그 자체의 영역이다. 번역하는 행위는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며, 모순이 타협될 공간을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번역하는 행위는 곧 탐구하는 행위이다...언어는 변화를 거듭하고, 컴퓨터 생성 텍스트 또한 마찬가지다. 역자는 문화적 변화와 기술적 변화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텍스트는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진화하며, 변화하고, 또 변형된다. 역자로서, 우리는 텍스트와 함께 진화하고자 해야만 한다. 우리는 번역하는 언어를 비롯한 모든 문화 형식들을 역동적이고 상호 의존적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번역 역시도 다른 문화 행위들과 공존하려면 역동적이고 상호 의존적이어야만 한다18
y.10년 전까지만 해도 만산 계곡 탑들이 늘어선 공간에는 조각논들이 이어져 있었다. 운주사가 폐사된 이후 오랫동안 인근의 농민들이 그 좁은 빈 땅에 농사를 지어왔고, 그리하여 불교유적이 자연스레 생산활동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힐트만 교수가 매료된 대로 운주사터는 고려시대 신성한 불교의 성지이면서, 석탑과 석불들이 배열된 야외조각장이고, 먹고살기 위한 농토였던 것이다...계곡 서쪽에 1m 20cm 높이 미륵 머리가 땅에서 튀어나와 있다. <분포도>에서 10번. 그 사이 이 미륵 두상은 파손되어, 하늘로 얼굴을 향하고 땅바닥 위에 평평하게 놓여 있는데, 이마 위가 손상되어 있다.
얼굴에는 눈들의 선이 나타나 있지 않다. 눈썹을 나타내는 두 개의 곡선이 눈들의 선과 하나를 이루며, 코허리로 이어져 있다. 이 선이 좁은 코를 지 탱하고 있다. 그 아래 입은 아주 작은 꽃잎과 같다. 전체 머리 모양은 하나의 큰 꽃잎과 같다. 양쪽 귀는 가장자리에 좁은 선을 두른 사각형 모양으로 타원형의 '안엽' 뒤에 있다. 꿈꾸는 듯한 한국적인 얼굴이다. 나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미륵불이 땅 속에 함몰된 채 서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땅에서 고개를 내놓고 꿈을 꾸고 있다.
이 가운데 도대체 어느 것이 유일하게 옳은 번역인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일의성(一義性)을 요구하며 다양한 형태 중 오직 하나만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려 드는 서구식 습관에 빠지게 될 것이다...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천불동을 내 기존의 세계관의 틀 내에서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세계관의 틀 내에서만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 오직 어린아이의 삶만이 분리됨이 없이 이쪽저쪽을 넘나들 수 있다. 어린아이의 삶은 한 풍경의 이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풍경은 이성(理性)과 타산적 오성(悟性 )이 자라면서 비로소 객관적이 되어 육체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틀은 온 주의력을 요한다. 여기에는 머무를 수 있는 어떤 장소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이쪽 혹은 저쪽 방향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을 수는 있다. 우리 세계관의 틀은 운동의 소진선(消盡線)이요 지극히 어려운 수수께끼다...천불동 운주사에 관한 한, 보증된 지식 대신에 언제나 전설의 구조가 등장한다. 따라서 이 텍스트의 구조를 일직선적인 사상적 기표들로 용해시킴으로써 지식을 얻으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에게는 이 책은 임의적인 유희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미륵의 장식들은, 모이지 않으면서 자신을 내맡기고, 풀려고 하지 않고 그물에 걸리듯 사로잡히는 것에서 자신의 형상을 이루며, 오로지 자유로운 유희로서 출현하는 바로 그 엄격함 속에서 자신을 나타낸다. 연대기적으로 연대를 적을 수도 없고, 고고학적으로 공략해 들어갈 수도 없이, 이 돌들은 언제나 돌발적 사건으로 머문다. 그들의 장식을 다루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건이 될 것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역사는 시작도 끝도 모를 것이다19
z.한마디로, 포룸은 각 가정집의 아트리움이 그렇듯이 도시 전체를 위한 일상시설이 잘 갖춰진 일종의 메인 홀인 것이다...그때마다 좌우에서 달려드는 차량을 피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건물 파사드가 쭉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행자들을 자연스럽게 보호할 수도 없다. 소위 산책로들이 발달된 도시라면 어디에서나 보행자의 측면을 따라 건물 파사드들이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차례의 일부 발췌 I.건물, 기념비 그리고 광장 사이의 관계 II.광장 중앙 비우기 III.닫힌 공간으로서 광장 IV.광장의 규모와 형태 V.옛 광장의 불규칙성 VI. 군집한 광장 VII. 북부 유럽의 광장 구성 VIII.현시대 도시설계에서 모티브의 빈곤과 무미건조함 IX.현시대의 체계 X.현시대 도시설계에서 예술의 한계 XI.현시대의 개선된 체계 XII.예술적 원칙에 따른 도시정비 사례20
a.눈이 내렸다^소복하게 하얀 카페트가 깔리길 기대했건만, 기어코 하늘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세상의 기능이 불능이 되었도다. 마비되었도다
b.능력주의와 아빌리파이-수년의 연구 끝에, 조현병의 환청이나 망상과 같은 증상을 조절하면서도 부작용은 대폭 줄인 획기적인 신약, '아빌리파이 (Ablify)가 개발되었다. ‘아빌리파이’라는 이름은, ‘능력’을 의미하는 ‘어빌리티(albility)’에 동사형의 어미(fy)를 붙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복용자에게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겠다(Ablify)’는 그 자신만만한 이름처럼, 이 약물이 정신약리학 역사에서 지니는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아빌리파이는 ‘3세대 항정신병 약제’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약물화된 나, 약물화돠지 않은 나:매드프라이드 운동과 아빌리파이의 충돌-아빌리파이는 여러 신경전달물질 수용체(receptor)와 상호작용하며 '비정신장애인의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나’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신약이었다. 그러나 그 신약이 전제하고 있는 '다른 나’의 '원래의 나'에 대한 우월성을 거부하는 운동이 바로 매드프라이드 운동이었다. 매드프라이드 운동가들에게 광기란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질환도 아니며, 내가 치료하길 원하는 증상의 집합체도 아닌, 내 정체성의 한 측면이었던 것이다
정상성의 수호자에서 ‘화학적 사이보그’로: 아빌리파이는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우리는 당사자의 몸과 ‘바깥으로부터 결합하는 기계’와 ‘내부로부터 결합하는 약물’이 연속선상에 놓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몸-약물-기계 사이의 결합으로써 장애를 바라보려는 이러한 시도를 확장하여, 뇌와 정신과 약물이 결합하는 생화학적 작용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필자는 정신과 약물이 우리의 뇌 속 무수한 신경전달물질 수용체와 결합한 상태를 ‘화학적 사이보그(chemical cyborg)’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며, 새로운 정신약물학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그러나 ‘화학적 사이보그’의 관점을 통한 해방적 약물학 세계에서는, 약물은 더 많은 사이보그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Abilify)자유 확장의 도구로 작동한다. 약물이 케미컬로, 정상성이 다양성으로, 수동적 환자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화학적 사이보그로 변화하는 순간, 정신의학의 축은 당사자에게로 옮겨가고 새로운 약물학의 가능성이 열린다21
c.졸업설계 프로젝트는 여러 차례 그 주제와 대상이, 심지어 대상지까지 숱하게 변경되면서, 결국 러브호텔에서 시작되어 찜질방으로 마무리되어버렸습니다. 졸업설계 프로젝트는 그간 배워온 프로젝트를 관통하고 강제하는 하나의 명확한 개념으로서의 건축이 아닌 다양한 주제와 생각들이 혼합되거나 혼재되어버린채 끝나버렸고, 결국 저는 아직까지도 이 프로젝트를 명확히 하나의 아이디어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처음에는 그러기가 난해하고 불가능하다가, 서서히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는 선명해졌지만 그 동시에 그러고 싶진 않은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긴 시간동안 흩뿌려두었던 여러 생각들을 하나씩 다시 더듬어가는 과정을 실무를 하면서 틈틈히 밟아왔습니다. 마침내 저는 비로 텍스트의 즐거움the pleasure of texts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질서와 통제를 벗어나 따로 부유하는 ’텍스트‘들은 프로젝트를 관통하고 강제하는 ‘개념’ 속에서 즐거이 이리저리 헤엄치면서 애써 박아놓는 경계를 장난스레 건드리고 일의적 프로젝트를 다의적 차원의 프로젝트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럼으로써 개념이라는 것은 레이어의 속성을 가지고, 덧대고 언제든 그 위에 쌓아 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버립니다. 프로젝트는 여러 침투를 허용해버리는 취약한 상태가 될지도 모르지만, 달리 보자면 다양한 함의를 수용가능하고 주변과 공명할 수 있는, 결국엔 지속가능한 영속성을 부여하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다른건 몰라도 반년 남짓의 일회성 프로젝트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큼은 성취하였습니다.
d.스페이스정크space-junk가 우주에 버린 인간의 쓰레기라면, 정크스페이스junk-space는 지구에 남겨둔 인류의 찌꺼기다. If space-junk is the human debris that litters the universe, Junk-Space is the residue mankind leaves on the planet. 근대화가 건설한 생산물은 근대 건축이 아니라 정크스페이스다. 정크스페이스는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응고된 것 혹은 근대화의 낙진이다...정크스페이스는 그것의 정점 혹은 붕괴점이다...그것의 개별 부분들은 기발한 발명의 결과물로서,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명료하게 설꼐되고, 면밀한 계산을 통해 추진되었으나, 그 모든 것의 총합은 결국 계몽주의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하급 연옥과 같은 소극笑劇으로 부활했다...정크스페이스는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것의 총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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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As you may know, in various theories “space junk”is the debris that is created by different satellite and planetary ventures. In a way, all the world relies on has the same junk status-Junk space. It is not a negative term, but just the kind of term that defines the expectations and the properties that architecture can have today-Rem Koolhass and Hans Ulrich Obrist(2006)
e.나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안in”에 있고자 골몰하는 카리스마적인 포스트비판의 저 모든 (접두어들), “포스트post” “신neo” “전위avant” “트랜스trans” 따위가 지긋지긋하다. 이들과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밖out”에 있는 게 아니라 [옆으로] “빗겨 나off”있기. “무대 뒤편off stage”에, “음정이 안맞게off key” “엇박자로off beat,” 그리고 가끔은 “저속한off-color” 모습으로...모험이 제공하는 것은 뒤집힌 미메시스의 가능성인바, 강렬한 상상은 자연을 모방하는 대신에 미래의 건축을 제안한다...모험의 건축은 문지방, 임계 공간, 다공성, 문, 다리 그리고 창문의 건축이다. 그것은 숭고의 경험보다는 한계의 경험에 관한 것이다 23
f.만일 도시가 거대한 주택과 같으며 또 주택이 작은 도시와 같다면, 주택의 다양한 부분들은 축소된 건물들처럼 인식될 수 있지 않을까?-레온 바이트스 알베르티...건축은 ‘유니쿰(unicum)’, 즉 주위의 배경과 단절적 오브제의 고유성에 기반하며 서로 경쟁적이다. 반면 도시는 시간의 층위와 흔적이 축적된 집합적 생성체로서 타협적이면서 자연발생적이다. 따라서 건축과 도시는 대립적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도시는 -대립적이든 혹은 상호적이든- 서로 얽혀 있는 직물적인 관계이기도 하다...많은 현대 도시들이 스스로를 예술 작품처럼 여기며 도시적 ‘유니쿰’을 갈구하면서 ‘바탕 없는 형상(figures without ground)’ 같은 랜드마크 건축들의 카니발이 기꺼이 되고자 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오늘날 어떤 건축에서는 ‘형상들 없는 바탕(ground without figures)’의 일부가 되길 선호하며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용 건물이 되는 것에 만족하기도 하지 않던가24
g.When you want to work on a new architectural idea, the first thing you need to formulate is a new idea of drawing architecture. I do believe that the political sometimes lies in these seemingly marginal aspects of the profession, in how you construct a drawing, how you craft the meaning of your drawing25
h.<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 관심과 예술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듯하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26
i.여전히 가속도는 줄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초속 2천 킬로미터 이상으로 날아가고 있었으므로 태양의 인력권에서 벗어나는 것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노턴 선장은 마침내 라마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라마가 태양에 접근한 것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였고, 그런 다음엔 또다시 알 수 없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여때까지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미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태양계 밖으로 모습을 감출 것이다..그 기나긴 방랑의 종착점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라마는 은하수 너머 대마젤란 성운이 아련히 빛나는 우주의 한구석을 향하고 있었다27
i-1.낮과 밤, 그리고 해와 달, 어쩌면 인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사고할 수 밖에 없는 기원적 한계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의 이분법도 스스로 지니고 있다. 이제껏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문화유산이란 실은 이런 형이상학의 테두리 안에서 이룩된 셈이다...우리는 우주 속 인간의 지위에 대해 자뭇 진지한 실존철학 체계를 구축해왔다. 자연과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을 토대로 최근에는 여러 문예 창작물에서 외계의 다양한 지적 존재들을 꽤 세련되게 상상한다. 하지만 사실 그건 모두 우리 인간의 기대나 욕망이 투사된 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27
j.하지만 작가가 얼마나 진지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어떤 의미 있는 스타일로 그 의식을 드러내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누가 더 뜨겁냐, 하는 당위만이 중요했던 과거 리얼리즘 문학이 미학적으로 도태된 것은 바로 이런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_천명관 / 성질이 같고 밥그릇이 같을 때에 싸움이 일어난다. 진짜 새로운 것은 싸울 이유가 없다_박민규 / 나는 불온함으로 스케일을 만들고 싶다. 급진적인 작가, 이런 평가를 꿈꾼다_은희경 / 소설을 둘러싼 가장 큰 오해는 소설에 있어야 하는 것들로 여겨지는 요소들이 얼마든지 없어도 된다는 것이고, 20세기의 많은 소설들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어요. 그런 요소들은 소설 속에 없어도 좋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는 소설이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는 우리의 삶을 더 잘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죠_정영문28
k.프램턴이 비판적 지역주의를 통해 논의한 또 다른 측면은 환기였다. 그가 보기에 환기 방식은 지역 문화의 독특함을 반영한다. 이런 면에서 에어컨디셔닝은 오늘날 만연한 장소감 상실의 주범이다...막힘이 없는 널따란 대지에서든 제한된 부지에서든, 주변 환경의 매력적인 조건들은 건물을 대각으로 배치하도록 요구할 때가 있다. 이는 실제로 건물을 대각선 방향으로 앉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내부의 모퉁이에 개구부를 뚫어 주변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포착하는 대가 방향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특히 하단 창은 노이트라가 사막의 맹풍violent wind라고 규정한 바람에 대응한다29
l.오늘날 이러한 욕구와 관심사, 가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 가치에는 세계를 구성하고 질서를 세우기 위한 공공의 합의를 이끌어낼 힘이 없다...학자들은 이 총체적 상황을 놀라운 “개념적 공백”으로 명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새로운 비참조적 세계에 대해 차분하고 침착하게, 해석 없는 리얼리즘으로 다루려 한다...따라서, 새로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회의 감수성을 인식하는 건축가의 능력이다...’작가-건축가’는 자기 발견을 실험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 중심적이거나 사회로부터 은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건축가’는 사회의 한계를 탐색하는데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 사회에 대한 진정한 책임을 지게 된다30
m-1.계속 출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것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병실로 들어가 캐서린이 숨을 거둘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의식이 없었고, 숨을 거두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실 밖 복도에서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죠?”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호텔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시 여기 있겠습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아니요. 아무 말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제가 호텔까지 바래다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해보니..”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호텔까지 바래다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는 복도를 떠났다. 나는 다시 병실 문으로 갔다.
“지금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아니, 들어가겠어요.” 내가 말했다.
“아직 들어오실 수 없어요.”
“당신 나가요.” 내가 말했다. “당신도.” 그들을 쫓아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꺼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각상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는 밖으로 나와 병원을 떠나 빗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31
m-2.싸움에 지고 엉망이 됐을 때 침대처럼 편안하게 받아주는 친구는 없지. 그의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친구인지 난 미처 깨닫지 못했어. 그런데 자네가 뭐한테 졌지? 그가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난 진 게 아니야.”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다만 너무 멀리 나갔다 왔을 뿐이야.”
그가 조그만 항구로 배를 몰고 들어왔을 때 테라스의 불빛은 꺼져 있었다. 그는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풍이 지속적으로 속도를 더해가더니 이제 제법 강한 바람이 되었다. 하지만 항구는 조용했다. 그는 바위더미 아래쪽의 조그만 자밭까지 배를 몰아갔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혼자 힘으로 가능한 한 바싹 육지에 배를 댔다.
그런 다음 배에서 나와, 바위에 배를 묶었다. 노인은 돛대를 내리고 돌을 감아 말고 이를 묶었다. 그런 다음 돛대를 어깨에 메고 집을 향해 비탈진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였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리의 불빛에 반사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고기의 거대한 꼬리를, 배 뒤편에 곧추 세워져 있는 고기의 거대한 꼬리를 내려다 보았다…오두막에 들어서자 그는 돛대를 벽에 기대어 놓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물병을 찾아 물을 마셨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은 그는 담요를 끌어다 어깨를 감싼 다음 등과 다리를 덮었다. 곧이어 그는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두 팔을 쭉 펴고 양손의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게 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32
n.애초에 나는 미술에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벽에 걸린 이미지만큼이나 우리 머릿속에 형상화되는 이미지도 중요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예술은 모호성을 창출하며 한 작품의 의미는 비로소 맥락 속에서 추론될 때가 많다. 그래서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게토의 수퍼스타여, 나는 비트박스 로커, 너는 내 비트에 맞춰 춤을 춰(Chetto Supastar. Iim a Beat Box Rocker and You're Dancing to my Beat.)” 바로 자유다…사람들은 시력을 잃으면 오직 검은색만 보일거라 생각한 다. 눈먼 자들의 세상은 종종 '밤'으로 묘사되곤 했다. 여덟 살에 시력을 잃은 프랑스 작가 자크 뤼세랑(Jacques Lussey ran)이 썼듯이,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시각장애인의 세상을 ‘끔찍한 밤’으로 정의하고 또 그렇게 묘사해 왔다. 뤼세 랑은 이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표현에는 눈먼 자들이 마치 세상의 빛으로부터 차단된 존재라는 철학적인 선입견이 담긴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표현이 객관적인 측면에서도 잘못된 사실이며, 눈먼 사람의 세계에 있을지라도 빛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시력을 잃더라도 ‘흑암’ 속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붉은색, 갈색, 그리고 검은색이 뒤죽박죽된 어두운 적갈색의 움직이는 듯한 작은 분화구 같은 것이, 즉 몸의 안쪽에서 색깔이 박동하는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결코 아무것도 못 보는 게 아니다.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려는 갈망, 그러나 동시에 결코 관통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는 느낌과 같다. 마치 시선이 육체 내부에 밀봉된 것 같다. 그런데도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인질로 묶인 두 눈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몇 년 후 나는 나타샤에게 박람회에서 쉽게 판매할 수 있는 작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수 많은 못으로 <나는 이런 식으로 일할 수 없어요 (ICant Work LIke This)라는 문장을 박람회 부스의 벽에 박아 넣었다. 그녀는 그렇게 작업하지 않았거니와,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설치 아래에는 망치 두 개와 여러 개의 못이 놓여 있었다. 미술 시장과 그 시장의 요구에 관한 이 풍자적인 보이콧 선언은 역설적이게도 미술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현재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포함해, 네 개의 최고 수준의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예술가들이 느끼는 감정을 아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많은 기사와 에세이, 학술 논문에서 다루어졌으며, 아직도 내게 이 작품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물론 나타샤는 다시는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처음부터 나는 대안 부동산, 곧 아무도 관심 두지 않으나 잠재성있고 비교적 저렴하게 얻을 수 있는 특별 부동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리는 프리드리히 스하인의 저수탑 건물, 텅 빈 지하철 역사, 리히터펠데에 있던 여성 전용 교도소, 샤를로텐부르크의 오래된 콘크리트 차고 등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중에 적합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매우 존경하는 건축가 친구인 아르노 브란들후버(Arno Brandlhuber)가 크로이츠베르크 알렉산드리로의 어느 브루탈리즘 스타일의 교회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고 소개해 주었다. 그는 이 교회를 ‘잔혹하게 아름답다(bruti-ful)’고 표현했다.33
o.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그런데도 인간을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익살이라는 줄 하나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 가까스로 이루어질법한 위기일발,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심지어 제 가족을 대하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괴롭고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아 그저 두렵고,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다 보니 어느새 능숙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저는 어느 틈 엔가,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인데 저 혼자, 어김없이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웃고 있습니다. 이 또한 저의 어리고 슬픈 익살의 일종이었습니다.34
p.Living and Working continues a tradition that we can call "typological design," which consists in reforming existing housing types toward alternative forms of habitation. The question of typology has a long history within our discipline. The word type comes from the Latin typus which means figure, symbol, emblem. The Latin term has roots in the Greek tupos, which means mark, and the Sanskrit tupto, which means to beat, strike, leave a mark. These etymologies of the term make clear that type has to do with marking an object or body so that it can belong to a class or a group of things. Discourses on type in architecture emerged in the nineteenth century as a way to classify buildings not so much in terms of their style or image, but in terms of their spatial and structural organization. As is well known, the earliest definition of type in architecture was formulated by Antoine Chrysostome Quatremère de Quincy in his Dictionnaire historique d'architecture (1825). For Quatremère, type represents not an image or a model to be copied, but an idea that can serve as a rule for the model. In spite of this idealist understanding, type as a design tool was prompted by the industrialization of the building process, and the consequent standardization of design and construction which found in mass housing one of its most important manifestations. It was with the rise of mass housing betwee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that typological design became a method whose goal was not only standardization, but also the subtle imposition of class and gender roles through specific norms and spatial layouts. In the 196os, interest in typology—that is to say, in the discourse on type-reemerged in the writings and studies of architects such as Saverio Muratori and Aldo Rossi." This "third revival" of typology (after its theorization at the beginning of the nineteenth century and its instrumentalization by the modern movement) had a historicist flavor since it was seen as a way to anchor architectural design to the history of the city at large? Rossi's interpretation of typology was influenced by the historian and theorist Giulio Carlo Argan for whom architectural form is inevitably rooted in historical precedents. Even though Rossi emphasized the link between type and economic factors such as property, what many discourses on type seem to have missed is that types are informed not only by ideas, mass production, or historical lineage, but also and especially—by the way political institutions, social relationships, and market forces define ways to occupy space. This is especially true in the case of housing, whose typological resolution has always been the product of class and gender politics…A type is not a model to be copied, but rather the deep structure of buildings; as such, the relevance of the projects presented in this book lies in the way they attempt to rethink the architecture of domestic space not in terms of its image but in terms of its spatial relationships.35
q.Architecture, however-the world of objects created by architecture-is not only described by types, it is also produced through them. If this notion can be accepted, it can be understood why and how the architect identihes his work with a precise type. He is initially trapped by the type because it is the way he knows. Later he can act on it; he can destroy it, transform it, respect it. But he starts from the type. The design process is a way of! bringing the elements of a typology-the idea of a formal structure-into the precise state that characterizes the single work…One of the frequent arguments against typology views it as a "frozen mechanism" that denies change and emphasizes an almost automatic repetition.' However, the very concept of type, as it has been proposed here, implies the idea of change, or of transformation. The architect identifies the type on or with which he is working, but that-does not necessarily imply mechanical reproduction. Of course, the typological approach per se does not demand constant change; and when a type is firmly consolidated, the resultant architectural forms preserve formal features in such a way as to allow works of architecture to be produced by a repetitive process, either an exact one as found in industry, or an approximate one, as found in craftsmanship. But the consisteney and stability of forms in such instances need not be attributed to the concept of typey it is just as possible to conclude that the struggle with an identical problem tends to lead to almost identical forms. Or in other words, stability in a society-stability reflected in activities, techniques, images-is mirrored also in architecture…
Mass production in architecture, focused chiefly on mass housing, permitted architecture to be seen in a new light. Repeatability was desirable, as it was consonant with industry. "The same constructions for the same require-ments," Bruno Taut wrote," and now the word "same" needed to be understood ad litteram. Industry required repetition, series; the new architecture could be pre-cast.Now the word type in its primary and original sense of permitting the exact reproduction of a model-was trans-Normed from an abstraction to a reality in architecture, by virtue of industry; type had become prototype…
The architecture of Rossi initially seems to stand against this discontinuity. For here the unifying formal structure of type disappears. In spite of Rossi's strenuous defense of the concept of type in the construction stage of his work, a subtle formal dissociation occurs and the unity of the formal structure is broken. This dissociation is exemplified in Rossi's house, where the almost wall-like structure of the plan is connected with the pilotis below and the vaulted roof above. There is an almost deliberate provocation in this breakdown and recombination of types. In a highly sophisticated manner, Rossi reminds us of our knowledge-and also our ignorance-of types; they appear broken, but bearing unexpected power. It might be said that a nostalgia for an impossible orthodoxy emerges out of this architecture. In the work of Rossi, and even that of Venturi, a discomforting thought arises: was it not perhaps at the very point when the idea of type became clearly articulated in architectural theory—at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that the reality of its existence, its traditional operation in history, became finally impossible? Did not the historical awareness of the fact of type in architectural theory forever bar the unity of its practice?…
To understand the question of type is to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architectural object today. It is a question that cannot be avoided. The architectural object can no longer be considered as a single, isolated event because it is bounded by the world that surrounds it as well as by its history. It extends its life to other objects by virtue of its specific architectural condition, thereby establishing a chain of related events in which it is possible to find common formal structures. If architectural objects allow us to speak about both their singleness and their shared features, then the concept of type is of value, although the old definitions must be modified to accommodate an idea of type that can incorporate even the present state, where, in fact, subtle mechanisms of relationship are observable and suggest typological explanations.36
r.프레링거 도서관의 분류, 배치 전략은 다음 세가지 조건에 맞춰 설계됬다. 첫째, 각자 혹은 둘 다 특별히 관심을 둔 영역만 다룬다. 모든 분야를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컬렉션을 꾸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둘째, 따라서 프레링거 도서관은 미국 의회도서관 분류법이나 듀이 십진분류법과 전혀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술과 정치를 동시에 논하는 책, 핸드메이드 필름, 자연 문화 인터페이스 담론서, 사회가 청소년을 악마 취급해 온 역사를 다룬 책은 어느 섹션에 들어가야 하는가? 그 밖에도 우리의 수많은 관심 영역이 기존 분류 체계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셋째, 우리는, 특히 나는 연구 과정이 세상을 물리적으로 탐험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경험에 따르면 창조적이고 지적인 작업은 세상에 직접 뛰어드는 데서 비롯한다. 단순하게는 여행을 떠나 숨겨진 장소를 발견하거나 시골 서점에서 숨겨진 책을 찾아내 손에 넣거나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다...이를테면 서고의 첫 번째 통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뻗어 나가면서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북대서양에 도달하는데, 이 경로를 따라 점차 자연사, 자연-문화 인터페이스, 농업, 전원생활, 채굴업 등 경관을 기반으로한 포괄적인 주제가 등장한다. 이렇게 여러 주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도록 틀을 짠 뒤에 섹션마다 다양한 자료를 섞어 두어 '예기치 못한 발견'에 따르는 재미가 증폭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정부 문서와 그것을 해석하는 논문이, 대안적 역사서와 정통 역사서가 서로 이웃한다...책들은 (••)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가장 이상한 점은 바르부르크가 책들을 옮기고 또 옮기는 데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유 체계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사실들 간의 연관성에 대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책들을 다시 정리했다. 연구법이나 관심사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도서관 역시 변신했다. 규모도 작고 장서도 적었지만 그곳은 맹렬히 살아 있었으며, 바르부르크는 도서관에 인류사와 관련한 제 생각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37
r-1.노르웨이에서 진행되는 <미래 도서관〉은 한 세기 동안 매년 비공개 문학 작품을 한 편씩 더해 가는 개념적인 프로젝트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호명된 작가 1인이 전체 100편으로 구성될 아카이브에 작품 하나를 더하게 된다. 패터슨은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오슬로 북부 숲에 나무 1,000 그루를 심었다. 나무들이 잘 자란다면 100년 뒤 100권의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를 전부 제공해 줄 것이다...부활 도서관 (Reanimation Library)은 뉴욕 기반의 예술가 앤드루 비콘(Andrew Beccone)이 2006년에 설립해 공공에 개방한 이래로 꾸준히 컬렉션 규모를 키워 가고 있는 참고 도서관이다. 서가는 20세기에 발행된 책으로 가득하다. 텍스트에 담긴 정보는 시대에 뒤처졌을지 몰라도 다양한 이미지가 수록돼 시각 자료로서 무척 흥미로운 것들이다. 비콘은 헌책방, 중고품을 내놓은 누군가의 앞마당, 장서를 처분하는 도서관, 쓰레기 더미, 길거리 등지에서 삽화가 실린 '화석' 같은 책들을 발굴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망라한, 방대한 이미지 아카이브가 탄생했다. 부활 도서관은 열람실에 스캐너와 복사기를 비치해 이용자가 마음껏 자료를 활용하면서 낡은 콘텐츠로 새로운 성좌를 짜도록 장려한다...20세기 초부터 곳곳에 등장한 이동식 도서관은 마치 당나귀, 낙타, 배, 자동차 혹은 기차를 책들과 조합해 만든 지식의 아상블라주 같았다. 아래 이미지는 1961년 켄터키 길드 열차에 꾸며진 이동식 도서관이다. 열차는 경로를 따라 여러 역에 정차하면서 예술, 공예 분야의 책을 소개했다...브루클린 기반의 《캐비닛 매거진》(Cabinet Magazine) 편집진은 2002년 뉴멕시코 사막 한 구석을 자신들의 영토 '캐비닛의 땅'(Cabinetlandia)으로 선포했다. 2004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예술가 매슈 패스모어(Matthew Passmore)와 합작해 그 땅에 국립 도서관을 세웠다. 도서관 시설은 철제 서류 캐비닛이 전부다. 붙박이장처럼 뒤통수를 반쯤 묻어 놓은 캐비닛 안에는 플라스틱 봉투에 담은 카탈로그, 캐비닛 매거진 과월호, 그리고 천으로 된 간이 의자, 햇볕을 가릴 우산, 미지근한 캔 맥주 등 몇 가지 실용 아이템이 보관돼 있다...오늘날의 독자들은 1890년대라면 SF에나 등장했을 법한 독서 공간과 독서 기기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이제 우리가 어떤 종류의 텍스트든 대체로 컴퓨터, 스마트폰, 전자책 단말기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읽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터넷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열람실이자 모든 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 모든 지식과 하이퍼지식을 보유한 보르헤스적 도서관을 가장 근접하게 구현한 공간이 됐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물리적 도서관을 통째로 가공해 장서를 전부 디지털로 변환하는 대형 프로젝트가 여러 건 진행되고 있다. 구글이 2004년부터 주요 대학 도서관과 제휴를 맺고 진행하는 '구글 도서관 프로젝트'(Google Library Project)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인터넷 아카이브', 하티트러스트(HathiTrust),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 등이 구글이 스캔한 자료를 일부 활용하여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중 해적 아카이브인 Arg.org는 전적으로 이용자 커뮤니티의 참여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Arg.org 이용자는 직접 PDF나 전자책 파일을 업로드한 뒤 '인덱스카드'를 작성하고 주제별 서가'를 생성해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이렇듯 Arg.org에서는 도서관을 발전시키고 지속하려는 이용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전면에 드러나는데, 이는 디지털화 공정이 완벽히 자동화되어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인상을 주고자 인간이 노동한 흔적을 지워 버리는 구글의 경우와 극명히 대비된다.37-1
r-2.그러나 책 수백만 권을 스캔하는 데는 포드(Ford)식의 반복적인 육체 노동이 필요한데, 이를테면 페이지를 넘기거나 스캐너를 작동시키는 일이 그렇다. 이런 수작업의 증거가 디지털화된 책 안에 숨어들기도 한다. 실수로 스캔본이 흔들리거나 노동자의 손가락이 페이지와 함께 스캔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윌슨은 이렇듯 육체 노동이 '미끄러지며' 남긴 흔적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감춰져 있던 생산 노동을 유형의 작업물에 담아 미학적 사건이자 페이지에 도사린 균열로 제시함으로써, 디지털 복제 시대, 실체 없는 디지털 프로세스 안에 인간 존재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37-2
s.문득 캐롤라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기의 초여름에 다다른 시절이었다. 남반구 끝자락 이국땅 어딘가에서 그녀와 연이 닿은날, 나는 그 이전에 에덴 공원mount. eden에 들렀다. 에덴 공원은 그 이름답게 잘 다듬어진 잔디 민둥산 윗자락에 신화적인 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나는 그 언덕 위에 내리는 따가운 햇빛과 그 나무 아래 드리운 그늘의 스산함을 동시에 기억한다. 이 서늘함을 나는 단순히 나무 그늘아래에서만이 아닌, 그곳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그늘에서, 그곳에 뿌리내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그늘에서, 뿌리를 거세당한 사람들의 그늘 곳곳에서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그곳에서 일년간 춥지도, 그렇다고 마냥 덥지도 않은 낯선 계절을 캐롤라인 아주머니와 보냈다.
t.7월경에는 그 유명한 파리오의 경기가 실시되어 이 돌말뚝의 외측을 시계방향으로 말이 달린다. 관상(觀象)은 광장의 안쪽과 팔라초 퍼브리코 앞에 설치된 자리에서 보는 것 외에도 건물의 창이란 창에 모두 모여 성원을 보낸다. 공간으로서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건물의 외벽이 파리오 때에는 아리나의 안쪽으로 가역(可逆)된다는 것이다. 마치 지갑을 뒤집어서 안쪽을 밖으로 냈을 때와 같다. 일상의 시에나는 차분한 시가로서 이 캄포광장에는 많은 비둘기가 모이고 작은 노점상도 보인다. 그리고 돌의 포장은 완벽하지만 한 그루의 나무도 없는 것은 놀라우며, 말뚝 안쪽의 대공간은 바로 보행자들의 천국으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38
u-1.1장 연기 없이 타는 불-이제 기술 매체는 예술의 도구에서 벗어나 예술을 견인했을 뿐 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사회•정치적 변화까지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테크네가 귀환한 것이다. 포스트-테크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이제 발광하는 스크린(표면적 표현 형식)을 끄고, 검은 화면(실체적 구조)을 봐야 할 때다. 기술의 ‘억압적인 의지’를 숨긴 채 반짝이고 있는 발광체를 끄고, 블랙 미러의 실체와 그곳에 비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봐야 할 때다.
2장 미래의 침묵-우선, 인간 없는 세상에서 인공지능은 작동 가능한가? 작동 가능하다면 인공지능이 예술의 감상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공지능의 예술 창작 딥러닝을 위한 빅데이터의 원재료인 인간의 예술 작품이 더는 창작되지 않을 때(인간이 세상에 없을 때), 인공지능은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새로운 데이터가 입력되지 않을 때, 작품의 다양성이 한계에 도달히여 어떤 패턴으로 무한 반복 제작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문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한가지다. 바로 ‘과연 기계는 욕망하는가?’
3장 기계 속의 유령-유켈리스는 1969년 [메인터넌스 아트를 위한 선언문 1969]에서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 혁명은 중요하다. 하지만 혁명이 전부는 아니다. 그동안 제도비판미술은 역사화하고 우상화하는 미술의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은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작품과 행위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미술 행동은 디지털-인터넷 기술 시스템이 조직하고 있는 자동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그 내부의 작동방식을 감지할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준다. 디지털-인터넷 혁명 이후에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여전히 사람이다
4장 코로나19 블랙홀-우리는 강제로 도착한 미래를 살고 있다. 서서히 진행되던 원격시대를 코로나19는 강제적으로 우리의 턱 밑에 끌어 다 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먼저 도착한 미래를 과거로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39-1
u-2.1장 태양과 바다와 인류세, 그리고 물질생태미학-인류세라는 개념이 근대성의 전략적인 권력관계와 생산관계에 새겨진 자연화된 불평등과 소외, 폭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 관계에 관해 생각하도록 전혀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평등, 상품화, 제국주의, 가부장제, 인종적 구성체.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은 대체로 고려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문제의 틀을 잡는 작업에 대한 사후 첨가물" 로 인식될 뿐이다. 이러한 무어의 지적은 인류세가 단순히 환경오염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근대의 작동 방식이 실패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희망의 미래를 위해 궁구할 일은 인간의 성장력을 지우려 하거나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사회-자연 의 뒤섞이고 이질적인 전선들 전체 위에서 접합}한 새로운 테크노-생태 실천을 도모하는 일이리라. 그리고 이 구절의 각주에 따르면 "가타리는 세 가지 사회적 생태철학'의 비전을 갖고, 생태계(자연) 사회 개인(주체) 준거세계, 기계권(과학기술의 인공계) 사이 상호작용을 횡단해 생태학적 사유와 실천을 꾀 할 것을 요청했다"라고 적고 있다.
3장 사막에 피어난 예술, 에술로 들어온 재난-버닝맨에는 10가지의 원칙, 혹은 신념이 존재한다. 근본적 포괄성, 나눔, 비상업화, 근본적 믿음과 자 립, 근본적 자기표현, 공동의 노력, 시민의 책임 의식, 흔적 남기지 않기, 참여, 즉시성. 이러한 열 가지 원칙 에 따라 버너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9일간 실험적인 생활을 한 다. 그들은 예술, 파티, 요리, 탐험, 명상, 종교, 스타트업, LGBT 등 특정한 주제를 기반으로 테마 캠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 개의 캠프를 모아 빌리지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전체 캠프를 대표하는 시장을 선출하기까지 한다. 버너들은 9일간 이상적 도시를 구축하는 것이다.39-2
u-3.4장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사실상 오늘의 미술은 미래주의가 선취했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는 행동 강령을 실천하며 개취(개인 취향)적이고 현취적이면서도 키치적이고 마취적인 모습을 보인다.39-3
u-4.다다익선은 빅데이터의 미덕이다. 이런 다타이즘 데이터주의 시대에 빅데이터는 아카이브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 재진행형인 역사의 기록 속에서 아카이브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 세상의 의미를 밝히려는 듯 아카이브 체제는 잠들 줄 모른다…거대한 데이터 뭉치인 빅데이터는 On(1)과 Off(0)의 이진 신호 체계를 사용하는 디지털이다. 이 디지털은 과거의 아날로그 정보를 모두 흡수하고 있을 뿐 아니라-음성, 소리, 노래 등 청각 자료와 사진, 그림 등의 시각 자료, 그리고 여러 문서로 남겨진 텍스트 자료 등 과거의 아날로그 매체 자료를 디지털로 전환하고 있다- 방대한 자료를 모아 학습하여 '판단할 수 있는 인공지능' 으로 변하고 있다. 인류 문명이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으며, 디지털 알고리즘이 이것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이진 신호 뭉치가 카멜레온처럼 번역 불가 능한 어떤 형태로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지금까지의 역사는 송두리째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아버지(절대적 가치)가 사라져버린 어느 날(포스트모던 시대) 자녀들(주체)은 흥에 겨워 놀았지만, 밤(불면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포스트모던 시대는 너무 늙었다. 모더니즘의 권위를 지워내며, 상대성의 깃발 아래 혼성, 모방, 다원, 주변 등을 앞세웠던 포스트모던 시대는 차이와 다양성이 상대주의적 개별성이 되면 서 서로 소통 불가능해져 버렸고, 폭력적 기제일 뿐인 보편성과 책임지지 않는 탈중심적 존재로서의 주체만 앙상하게 남았 다. 반면, 신자유주의에 힘입어,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 구축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 확산은 디지털 절대왕정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39-4
v.건물은 지어지는 순간부터 풍화 (weathering : 지표를 구성하는 바위, 돌따위가 햇빛, 공기, 물 등의 작용으로 점차 파괴되고 부서지는 현상]라는 과정을 통해 퇴화하고 소멸에 이른다. 비와 바람, 더위와 추위는 건물의 풍화 작용을 재촉한다. 돌, 벽돌, 나무처럼 오랫동안 건축 재료로 쓰던 것들은 풍화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공장에서 생산된 재료들은 자연에서 쉽게 변형되거나 소멸 되지 않는다. [도시의 이미지(The Image ofthe City)] (1960 년)라는 저작으로 유명한 케빈 린치(Kewin Lpack. 1918~19) 교수의 마지막 작업은 [웨이스팅 어웨이(Wasting Away)] (1990년) 다. 이 책은 폐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웰빙(well-being)과 마찬가지로 웰다잉(well-dying) 이 중요한 것처럼 도시 환경과 건물을 제대로 폐기(wasting well) 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모스타파비 (Mohscn Mostafavi, 1954~)는 레더배로우(David Leatherbarrow. 1953~)와 함께 쓴 책 [온 웨더링(On Weathering : The Life of Buildings in Time)] (1993년)에서 건축의 풍화와 시간 속의 건축을 이야 기한다. 건물은 완성되어 사용하면서부터 기후의 영향으로 천천히 낡아 가기 때문에 건축의 목표는 이 피할 수 없는 과정 에서 (기술을 통하여) 가능한 한 풍화를 지연시키며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노화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질문에 정답(correct answer)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응답(response)하는 일, 응답으로 질문을 이어 나가는 일이 아닐까. 제각각 해법은 다 르지만 본바탕은 하나로 연결되는, 도시 주택에 대한 질문과 답의 과정을 생각해 보는 지면이 되기를 기대한다.
P318. 기존의 이화마을 배치도(왼쪽), 건설사에서 고층으로 재개발하고자 한 안(가운데), 이화마을 재개발 단지가 그렇듯 옛길과 땅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다.[이화마을 재개발 정비 모델 배치도](오른쪽과 아래), 조성룡도시건축+기용 건축, 2007년. 서향이던 집들을 남향 아파트로 정리했다. 동과 동 사이에 마을의 옛길을 모두 살렸다.40
Q:길을 둘러싼 풍경이 이미 모두 달라졌을텐데, 길을 두고 마주하는 집들, 길의 모퉁이, 꺾인 담장, 담장 너머 나온 감나무, 이 모든게 사라진 채 길의 위치만 그대로 남는다면 옛길을 살린게 맞는걸까?40
w.여러 방면으로 이 실험은 환자를 위한 방이 일반적인 방과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켰다. 그 차이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인 방은 수직적 인간을 위한 방이다. 병실은 수평적 인간을 위한 방이고, 이를 염두에 두고 색상, 조명, 난방 등이 그에 알맞게 디자인 되어야한다.41
x.합리적인 평면, 감동적인 단면
y.근대 사회는 자신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서 인간의 형상을 정의하고 그 형상을 특정 유형의 집단적 정체성으로 대량생산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인간됨의 근대적 생산양식’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텐데, 휴먼 스케일이란 그 생산양식이 양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상적 형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휴먼 스케일은 이 생산양식의 설계 과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미래의 향방을 놓고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적 경쟁에 노출된다. 상이한 미래들은 각기 다른 휴먼 스케일을 꿈꾸기 때문이다.42
z.오늘날의 서울이 1963년에야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된 것처럼, 현재 서울의 역사라는 것도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띤 서울특별시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서울 역사>란 것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이렇게 서울을 보는 방법을 깨닫자, 서울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의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여러 시간의 겹, 바꾸어 말하자면 땅의 층인 지층(地層)이 아닌 시간의 층인 시층(時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처럼 시간의 층이 확인되는 공간을 <삼문화광장>이라고 부릅니다. <삼문화광장>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있는 틀라텔롤코 광장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곳에 서면 아스텍 시대,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그리고 현대의 건축을 한자리에 볼 수 있기에 <세 문화 광장 plaza de las tres culturas>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오늘날, 지혜로운 도시 탐험가들은 도시에서 노는 법을 여럿 개발했습니다. 지하철역이나 백화점의 대리석 벽면에 박혀 있는 암모나이트 등의 화석을 찾아내는 도시 화석 탐사, 폭우를 대비해서 지하에 건설된 대규모 집수조 등을 둘러보는 도시 속 거대 시설 탐사, 폐허가 된 건물이나 시설을 둘러보는 폐허 탐사, 예전에 철길이 놓여 있던 경의중앙선의 지상 구간이나 경춘선의 폐선 구간을 걷는 폐선 답사 등이 대표적인 도시 탐사 방법입니다. 그 가운데 저는 아파트 단지의 골목들을, 마치 밀림을 탐험하는 모험가의 마음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잠실 석촌동을 방문했던 1981년 가을은 한창 강남 개발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포클레인에 잘려 나가고 백제 지배층의 분묘들이 삽날에 찍혀 인골이 나뒹굴고 있는 현장은 마치 전쟁터 같은 참혹한 광경이었다.43
a.인간을 디자인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모든 이론은 인간이 늘 구심점이었다고 말해왔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재발명해왔다.
인간의 모든 다양성, 신비로움, 복잡함, 기묘함이 하나의 매끄러운 윤곽선으로 대체된다.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바로 그러한 것들 즉 심리, 목소리, 얼굴, 표정, 호흡, 체온, 리듬, 비대칭성, 땀, 다공성, 감정기복, 어색함은 인간의 외부 경계를 표시하는 단호한 선에 의해 사라진다…그림 속 벌거벗은 인물은 그를 둘러싼 도형 안에 있을 뿐, 다른 배경은 없다. 그림 속 도형이 인물의 움직임에 의해 정의되는지, 혹은 이 도형이 인물을 제한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 그림이 디자인을 인간의 신체를 감싸는 첫 번째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혹은 인간이 원이나 사각형의 중심에 서도록 강요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건 도형이 제약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이 모델에 근거하여, 고전 건축은 인간이 완벽해진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일종의 거울이 되었다. 비트루비우스는 '완벽한 건물들'의 비율이 인간 신체의 비율을 (측량체계 및 수학과 더불어) 기초로 하여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건축을 바라보면서 이상적인 인체 비율에 깃든 우주의 공명을 느끼도록 의도했지만, 정작 이 비율은 실제 인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에 이상적인 것이다…이후 규범화된 신체를 지녔으며 기하학에 둘러싸인 윤곽선 인물의 또 다른 변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인간의 신경계를 닮은 인공두뇌학 피드백 회로 속에서 등장했고, 1960년대에는 인체의 모든 혈관과 장기의 복잡한 상태를 연상시키는 우주비행사를 위한 생명 유지 배관장치에서, 1980년대에는 인체 내부와 외부 사이의 에너지 흐름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는 바이오피드백 회로에서 변형 인물들이 출현하고 있다…삶의 모든 영역에서 옷과 화장과 면도, 헤어스타일, 매니큐어, 장신구, 식습관, 자세, 걸음걸이, 운동을 통한 개인의 끝없는 자기변형과 대조를 이루는 듯한 인간 육체에 대한 규율이 존재한다. 매끄러운 윤곽선은 일상에서도 신체의 불안정한 경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상징하는 윤곽선은 새로운 표준인간의 이미지와 함께 자기복원의 공간을 차지한다. 마치 장비와 공간의 디자인이 이 인물을 위해 더욱 발전하고, 잘 재단된 옷처럼 제공되는 듯하다. 하지만 기본 체형, 도식적인 윤곽선은 그야말로 디자인의 산물이다. 디자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체는 절대로 순수한 상태가 아니다. 인체는 디자인된 것이다.
그로부터 수천 년 후, 터키 차탈회위크(atalhoyuk 같은 초기 도시에서는 최대 30구의 시신이 각각 사각형 주택 바닥에 매장된 채 건축의 통합적 요소로 간주되었다. 아돌프 로스가 1910년 시신이 매장된 흙더미를 건축의 원초적 지표로 사용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죽음의 디자인은 계속해서 진화한다.
“미키마우스는 한 생명체가 인간과 그 어떤 유사점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인간을 정점에 두는 모든 생명종 사이의 위계질서를 뒤흔든다…이 영화들의 큰 인기는 기계화, 이들의 형태, 혹은 오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대중이 그 안에서 생명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
2014년 인공지능이 이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자 새로운 시스템이 소개되었다. 이 시스템은 짤막하지만 놀라운 문장을 확인하도록 요구한다.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당신의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자체 조절 프로그램은 당신이 클릭하기 전후에 페이지에 주어진 내용, 그리고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를 관찰하여 당신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판별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기계들과 로봇처럼 행동하는 인간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내용의 책과 영화, 드라마 속 실존의 딜레마가 이제 일상에서 재현되고 있다.
“나의 꿈은 사람들이 쓸모없는 프로젝트를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무쓸모의 프로젝트들이 새로운 개념을 품고 있다.”-찰스 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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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밤의 고층 건물들 위^교회 십자가들, 네온 불빛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빨갛게, 노랑게, 하얗게, 디즈니-^천국, 열려 있다^24시간
Über den nächtlichen hochhausblöcken^christuskreuze, neonlichtumrandet^in rot, gelb, weiß, ein Disney-^himmel, geöffnet^rund um die u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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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하지만 저는 리서치와 그 단어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네요. 만약 이 단어가 너무 많은 의미를 포함하도록 확장해버리면, 그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 더 이상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읽었던 적이 있어요. 만약 “모든 것이 예술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카테고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꽃은 가장 호화로운 봄이 오래 방치된 증거, 순수하고도 무성한 과실이 미처 날뛰어 버린 것이다 46
d-1.돌이켜보면 우리는 근대라는 인본주의적 자기 참조의 시대로부터 포스트모던의 역사 참조와 일상 참조의 시대를 거쳤었고,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라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근본 없는 무한참조 혹은 비참조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 사실인 것 같기는 하다.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적 전거는 더 이상 시대 배경과 함께 시간순으로 읽히지 않고 그것들은 그저 오늘날의 건축 이미지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무작위로 나열되어 읽힌다...그런데 모든 문화 정보를 계보학적으로 파괴시켜보겠다는 비참조건축 주창자의 태도는 니체의 태도를 닮고자 하며 그를 인용하기까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순수주의 태도 혹은 건축 순혈주의 태도와 더욱 가까워 보인다. 사실, ‘장식은 범죄다’라거나 ‘덜한 것이 더 한 것이다’라는 근대 건축의 자기참조적 순수주의 모토를, 지나온 역사와 문화 전반으로 적용하며 문화정보를 소거해가다보면, 이 태도들이 비참조건축이 주창하는 그 태도와 무척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그런데 순수주의의 가까운 원조는 퓨리즘(Purism)으로서 이 태도는 앞서 언급한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시대에 등장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 정서가 우려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매너리즘은 외부로의 탈출을 욕망하거나 선망하기보다는 과거와 오늘을 의심의 눈으로 재탐색하고 그 균열의 틈을 확보하며 재번역하여 이를 발판 삼아 새로운 지반을 얻고자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지 내부에 미련이 있거나 내부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6. 매너리즘은 상상력보다는 파상력(破像力)을 보다 높은 가치로 위치시키에 그러하다.
8. 따라서 매너리스트는 좀처럼 환영받지 못하고, 승전의 소식을 듣기보다는 종종 패전의 잔해 속에서 상념에 잠긴 멜랑꼴리아와도 닮아 있다.
11.그렇기에 매너리스트는 판단보다는 판단 유예의 성향이 있으며, 지식인의 태도보다는 범속성과 그것의 리얼리즘을 존중하니 교양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문화사나 예술사보다는 차라리 문명사, 인류사의 관점을 공유하지만,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적 태도와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47-1
d-2.첫번째 테제: 건축가들은 건축 역사와 결함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 두번째 테제: 20세기는 공간 디자인의 시대였다. 세번째 테제: 형태는 물질적 세계에서 불가피하다. 네번째 테제: 우리는 절충주의에 빠져 있다. 다섯번째 테제: 우리는 시간 디자인의 세기에 접어들고 있다.
건축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무엇을 제공하기보다는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건축은 결코 하나의 결과가 아닌, 항상 진행 중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한편 건축가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을 설계하고 토론하고 있다. 47-2
e.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사진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사진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허나 대단한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비극으로 삶을 마감했던 독일의 문예비평가가 말했다던가. 지금의 문맹은 글을 읽지 못함이지만, 미래의 문맹은 이미지를 읽지 못함일 거라고. 지금이 바로 그 미래다.
e-1.사진이라는 털:...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간명하다. 하나, 털은 몸통이 아니다. 둘, 하지만 털은 몸통을 암시한다. 셋, 털에 만족하지 않고, 몸통까지 애무하다간 다치는 수가 있다. 넷, 그렇다고 털에만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 네가지 교훈에서 털을 ‘사진’으로, 몸통을 ‘세상’으로 치환하면 앞으로 내가 할 얘긴 모두 정리가 되는 셈이다...사진이 보여줄 구 있는 건, 딱 그만큼. 몸통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오롯이 그대의 몫. 사진은 털일 뿐, 오해하지 말자!48
f.핵심은 이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교통에서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다른 분야보다 더 빠르게 증가해 왔다. 개발 방향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이 추세가 뒤집힐 것이라고 전망하기는 어렵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이것은 이동에 대한 열망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가장 융요한 원인으로 꼽힐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유럽조차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교통은 지금까지 비난이 집중되었던 석탄화력만큼, 또는 그보다 더 중요한 배출원이 될 가능성의 증거로 보인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교통의 지속가능성이 의심스러운 현실에서 나는 이동의 위기를 본다...이렇게 공공교통 도보와 공공교통망 사이의 연계로 이루어진 망으로 연결된 도시 공간이 있다. 다시 말해 집에서 나서 목적지의 문 앞에 도달할 때까지 별다른 불편함 없이 보행과 공공교통만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공간이 있다. 이를 확장된 걷기 공간이라고 부르자. 또 다른 한쪽에는 이동의 대부분을 주차장과 주차장을 오가며 승용차로 수행하고 걷기 공간은 다만 납치된 수준으로만 건물 내에 남은 도시 공간이 있다. 이런 도시 공간을 자동차 지배 공간이라고 부르자.49
g....무엇이냐 하면 <친밀함의 수준>이다. 근접성과 거리의 문제이다. 고전주의 건축가라면 스케일이라고 하겠지만 그 말은 너무 학구적이다. 나는 스케일이나 치수보다 좀 더 구체적인 갓을 말하고 싶다...지나가는 사람을 근사하게 보여주는 높고 슬림한 문, 특정한 형태가 없는 평범하고 넓은 문, 지나가는 사람을 위풍당당하게 보여주는 위압적이고 웅장한 정문. 모두가 사물의 크기, 매스, 중력과 관련이 있다. 두꺼운 문과 얇은 문. 얇은 벽과 두꺼운 벽...나는 실내의 형태, 텅 빈 실내가 외부의 형태와 동일하지 않은 건물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선을 그려서 평면도를 완성하고는 여기가 12cm 두께의 벽체이고 실내와 실외가 이렇게 구별된다는 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 실내가 여태컷 인식하지 못한 숨은 매스로 느껴지는 공간, 이런 것을 원한다.50
h.케홀름에게 가구는 그저 방에 늘어놓는 물건이 아니다. 가구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매개체이며, 가구를 디자인하는 일은 곧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케홀름의 가구와 그것이 속한 공간은 서로 닮아 있다. 명쾌하고, 논리적이며,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꼭 필요한 크기, 구조, 형태, 비율만을 갖추고 있고, 불필요한 것은 전부 제거되어 있다. 올곧고 직선적인 느낌의 가구들은 자연스럽게 오와 열을 맞춰 배치되어 공간에 반듯한 질서를 정립한다...폴 케홀룸의 가구는 공공성을 띤다. 재료의 본질에 집중하여 최소화된 구조를 갖춘 그의 가구들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간결하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케홀름의 가구는 공공장소에서 자주 사용된다. 시청, 호텔, 로비, 공항 라운지 등,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스타일 이상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디자이너의 자세라고 여기며, 상업성을 높이기 위해 상투적인 디자인을 복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택은 수많은 함정과 오류가 도사리는 가시밭길과 다름없었지만, 케홀름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 길이 아니고서는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또한 베그너는 가구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는 항상 보통 사람들의 형편에 맞는, 특별할 정도로 높은 품질의 특별하지 않은 것들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그의 사회적 정신은 북유럽 디자인 특유의 민주적 성향을 대변한다..“마치 젖은 찰흙을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빚어 굳히듯이, 어떤 주어진 물질에 그 물질의 본성에서 비롯되지 않은 선결된 형태를 부여한다면 그 형태는 기계적이다. 반면, 유기적인 형태는 선천적이다. 그것은 물질의 내부로부터 스스로 발달하며 갖춰지고, 그 발달이 완전해짐과 동시에 외적 형태가 완성된다. 생명이 그러하듯, 형태도 그렇다.” 땅속의 대리석과 숲의 나무, 평원의 소는 반짝거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테이블 상판이나 의자 시트의 형태로 변화시킬 때 매트한 표면을 부여하는 것은 재료 고유의 성질을 표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인 것이다.51
i.나는 여기 이것을 지금은 슬프게도 유골로 남은 오래전의 슈만과 그의 사랑 클라라에게 바친다. 나는 이것을 혈기왕성한 인간/남자*인 나의 피처럼 짙고 검붉은 진홍색에 바치며, 따라서 내 피에 바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것을 내 삶 속에 사는 땅의 요정들, 난쟁이들, 공기의 요정들, 정령들에게 바친다. 나는 이것을 내 가난했던 과거, 매사에 절도와 위엄이 있었으며 바닷가재를 먹어 본 적이 없었던 시절의 기억에 바친다. 나는 이것을 베토벤의 폭풍에 바친다. 나는 이것을 바흐의 중성색이 진동하는 순간에 바친다. 나를 졸도시키는 쇼팽에게 바친다. 나를 겁먹게 했으며 나와 함께 불길 속에서 솟구친 스트라빈스키에게 바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에 바친다(이 곡이 내게 하나의 운명을 보여 주었던가?)무엇보다도 나는 이것을 오늘의 어제들과 오늘에, 드뷔시의 투명한 베일에, 마를로스 노브레에게, 프로코피예프에게, 카를 오르프에게, 쉰베르크에게, 12음 기법 작곡가들에게, 전자 음악 세대의 귀에 거슬리는 여러 외침에 바친다-이들 모두가 나 자신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내 내면의 어떤 영역에 먼저 도달했던 이들, 즉 내가 '나'로 터져 나올 때 까지 나에 대해 예언해 준 예언자들이다. 이 '나'는 당신들 모두이다. 나는 그저 나만으로 존재하는 걸 견딜 수 없으므로, 나는 살기 위해 타인들을 필요로 하므로, 나는 바보이므로, 나는 완전히 비뚤어진 자이므로, 어쨌든, 당신이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그 완전한 공허에 빠져들기 위해 명상 말고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명상은 결론을 필요로 ㅂ하지 않는다: 명상은 그 자체만으로 목적이 될 수 있다. 나는 말없이, 공허에 대해 명상한다. 내 삶에 딴죽을 거는 건 글쓰기다.
그리고-그리고 원자의 구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알려져 있다는 걸 잊지 말라.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을 많이 안다. 당신도 마찬가지나.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것조차 입증할 수ㅁ 없으니, 그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울면서 믿으라.
이 이야기는 비상사태 즉 재난 중에 벌어진다. 이 책은 미완성인데, 왜냐하면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누군가가 내게 그 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일까? 이 이야기는 약간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총천연색으로 진행되며, 맹세컨데, 내게도 그런 게 필요하다. 우리 모두를 위해 아멘.
이 모든 말들은 이 작품의 제목으로 고안되었던 것들이다.
전부 내 탓이다 혹은
별의 시간 혹은
그녀가 해결하게 하라 혹은
비명을 지를 권리 혹은
미래에 관해서는. 혹은
블루스를 부르며 혹은
그녀는 비명을 지를 줄 모른다 혹은
상실감 혹은
어두운 바람 속의 휘파람 혹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은
앞선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싸구려 신파 혹은
뒷문으로 조심스럽게 퇴장
-그녀는 무능했다. 삶에 대해 무능했다. 그녀는 문제가 생겨도 도무지 해결책을 찾을 줄 몰랐다. 그저 그녀 자신이 자기 안에서 어떤 식으로 부재하고 있는 가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을 뿐이다. 만일 그녀에게 뭔가를 표현할 능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세상은 내 바깥에 있고, 나는 내 바깥에 있다.(이 이야기를 쓰는 건 힘든 작업이 될 것이다. 나는 그 여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그녀를 통해 나의 모든 걸, 나 자신의 여러 두려움에 에워싸인 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 사실들 사이에 속삭임이 있다. 나를 경악시키는 건 그 속삭임이다.)52
j.김범은 기본적으로 ‘이미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작가는 오랫동안 형상에 얽힌 인간의 심리에 관심을 가지고, 형상과 실물의 심리적 동일성에 관한 이미지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뿐 아니라 가정과 연상을 통해 존재하거나 읽힐 법한 이미지를 포함하는데, 이는 재현의 의미를 짚게 한다. 김범은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는 재현 대신 사람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다르거나 새로운 실재를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즉 현실과 이미지의 관계탐구는 작가가 차츰 이미지의 실재성(actuality)을 찾게 되는 질문으로, 나아가 이를 인지라는 영역과 결부해 경험과 기억의 범위까지 확대한다.
[무제](1997)에는 딱딱하게 굳어진 세개의 돌 형상과 “one of these three rocks was a dragon before”(이 세 돌 가운데 하나는 원래 용이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단순한 드로잉과 평범한 문장일 뿐임에도, 관람자는 작가가 툭 내던진 문장으로 인해 어떠한 상황으로 빨려 들어간다. 작가가 만들어 둔 상황이 ‘진실일 리 없음’을 인지할지라도, 마치 세 돌 중 무엇이 마법 또는 저주에 걸린 용인지 가려내야 할 법한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다…이를 통해 사실상 재현된 이미지란 구체적인 형태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환기된다. 이미지와 심상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김범의 작업은, 시각적 그리기보다 글과 언어로 미술의 영역을 확장한 ‘언어적 전회’ 방법론에 맞닿아 있다.53
k.김재리:춤에 대한 기록은 ‘춤”(choreo)과 ‘기록’(graphy)의 합성어인 ‘안무’(choreography)라는 개념이 사용된 이후부터 춤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졌다. 춤은 사라지는 순간에 생성되는 ‘소멸적인 존재’인데, 안무라는 개념은 춤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 그것에 대한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혹은 춤을 만들기 이전에 그것을 설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20세기에 이르러 루돌프 라반은 움직임과 춤을 3차원적으로 쓰고 기록하는 체계, ‘라바노테이션(Labanotation)을 개발한다. 평면적이거나 특정 장르에만 한정해서 춤을 기록하는 데서 벗어나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기록 체계와 다르다...라바노테이션은 춤을 거의 원본에 가깝게 재현해 낼 수 있지만, 사람 몸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기보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이후 현재까지 라바노테이션이 널리 사용되지 못한 것은 실용적 측면뿐 아니라, 춤과 안무에 대한 정의가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 시대에 ‘움직임’은 춤에서 핵심적인 매체로 고려되었고, 안무의 개념도 ‘움직임을 고안하는 것’으로 정의됐다. 하지만 동시대 무용에서는 움직임 자체가 안무의 속성을 모두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에 주력하는 것은 근대적 잔재로 평가되기도 한다...이 밖에 라바노테이션의 기호와 규칙들을 단순화시킨 ‘모티프 라이팅’(Motif Writing)이 있다. 일종의 수정된 라바노테이션이다...모티프 라이팅은 그 동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움직임의 요소만을 기록한다. 신체적 자율성이 담보되면서도 특정 행위에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관찰자와 행위자의 관점에서 발견하는 의미가 있다...라바노테이션에서는 신체를 움직음을 만들어 내는 기능적 도구로 여겼다...하지만 동시대 무용에서 안무는 탁월한 움직임을 고안하거나 나열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레페키가 강력하게 주장하듯이 이제 그러한 움직임은 모두 소진되었다. 지금 안무는 동작뿐 아니라 사고, 성찰, 의식과 무의식, 경험과 정서를 춤과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와 문화가 정치적으로 춤에 달라붙어 있다. 이는 춤과 신체에 대한 중요한 ‘장치’(apparatus)이며 춤을 생성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권령은: 그러고 보면 스코어를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무척 많은 종류의 스코어를 만들고 사용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코/(Coco, 2008) 를 만들 때 각 나라의 고유 인사법 30여 개(악수, 비즈, 홍이 등)를 수집한 후, 각 인사 방법마다 번호를 매겨 제비뽀기 순서대로 춤의 구조를 짰다. 제비뽑기로 결정된 인사 순서가 스코어가 되는 셈이다. /망뜨는 사람/(Homo Knitiens, 2015)은 무대에서 신발과 속옷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옷을 갈아입는 행위가 춤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되는데, 입는 옷의 순서가 춤의 구조이자 스코어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글로리/(Glory, 2016) 창작 과정에서는 에피소드로 이뤄진 독립적인 장면들을 퍼즐로 만들어 구성했는데, 이 퍼즐의 배치 역시 춤의 구조를 결정하는 스코어가 된다.
박보나: 미술관에서 진행된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을 말해드립니다1/(I Tell What You Believe 1, 2013), /봉지 속 상자/(Laboite-en-sac plastique, 2010/2012)의 경우 전시를 만드는 사람들, 예를 들어 디자이너, 목수, 큐레이터, 작가, 매표소 직원, 전시장 지킴이 등의 미술관 직원, 혹은 동료 작가들과 일을 하면서 미술관에서 일어나지 않을법한 상황(전시 지킴이가 탭댄스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거나, 작가들이 저녁 장을 담은 봉지를 들고 다니는 상황 등)을 퍼포먼스로 진행했다.
오민: 스코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박보나: 작업의 방향이 들어 있는 생각의 체계이자 큰 우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54
l.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오늘날 성과주체의 심리 상태에 대해 상론하기에 앞서 먼저 규율적 주체의 심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자아는 규율적 주체이다. 프로이트의 심리적 기구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 장치이다. 족쇄를 채우고 억압하는 이런 심리적 장치는 규율사회와 똑같이 장벽과 문턱, 경계선, 국경 감시 초소 등으로 넘쳐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역시 오직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토대로 조직되어 있는 억압적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 Sollen”가 아니라 “할 수 있다 Konnen”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인간의 내적 영혼에도 구조적 변화를 가져온다. 후기근대적 성과주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대상으로 하는 복종적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심리를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 장치에서는 부인 vereinung과 심적 억압Verdringung. 위반에 대한 불안이 지배적이다. 자아는 “불안의 장소”이다.' 하지만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부인할 일이 거의 없다. 그는 긍정의 주체다. 만약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면, 후기근대적 성과주체에게는 더 이상 무의식이 없다. 그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자아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무시간적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금지와 억압의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로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사회를 떠난 것이다.55
m.설계 스튜디오의 목표는 학생이 교육자의 입장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 또한 건축에 관해 자기만의 첨예한 입장을 갖게 하는 것이 그 목표다. 교육자의 입장은 학생의 입장 구축을 위한 바탕이며 지적 자극이기에 중요하다. 학생은 교육자의 입장을 발판 삼아 그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그 입장을 딛고 반대 방향으로 행보할 수도 있다. 두 방향 모두 괜찮다. 다만 상기해야 할 것은, 학생의 도약을 위해 설계 스튜디오가 제안하는 논리는 단단해야 하며 입장은 첨예하고 오늘날 유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장 없이 건축 교육은 있을 수 없다.56-1
나는 건축 교육이 건축 자체를 전도하는 게 아니라 건축이 세계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현실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자기만의 확신을 전하고 열정을 불어넣으며 구체적으로 영감을 주는 일이라고 믿는다. 결국 학생들이 스스로 확신하도록 확신을 불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선생의 확신만이 학생들의 소명을, 건축의 잠재력을 스스로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울 수 있다.56-2
학교에서 가르칠 때나 실무에서 협업할 때 나는 비판적이면서도 시적인, 건축의 이중 개념화를 지지한다. 나의 설계 스튜디오들은 학생들이 유형학적 틀과 문화적 가정, 도시 형태학적 규준을 탐구하는 실험의 도가니가 된다. 특히 이런 실험이 시급한 영역은 렘 콜하스의 유명한 용법으로 ‘정크스페이스’에 해당하는, 도시 경관에서 탐구가 덜 된 주변부들이다. 스프롤이 일어나는 교외 지대나 건축적 가치가 없다고 종종 치부되는 옛 산업 시설의 황무지 따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주변부에는 잠재된 재료와 자원이 될 만한 기반 시설, 사회적 잠재력 등 확장된 생애 주기로 다시 활성화되기를 기다리는 ‘회색 에너지’가 존재한다. 그러한 ‘저차원적 타이폴로지(low typology)’들을 탐구하려면 잔여 또는 방치된 공간에서 건축을 정의하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술과 철학이 발견과 갱신을 위한 촉매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접근을 통해서 말이다.56-3
n.사백미터 계주 옆에서 장대 높이뛰기
o.결정적 공백, 필수불가결한 잉여.
이 이야기는 젊은 두 남녀의 데이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자는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한다. 그리곤 가게 앞에 뻘쭘히 서있기 민망한 나머지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곤 점원의 눈을 피할 구석진 곳을 찾는다. 괜히 옷을 보는 시늉을 한다. 서너개의 옷을 꺼내들었다 태그 한번 보는 척하고 내려놓길 반복하던 중 남자 옆으로 누군가 슬며시 다가와 팔짱을 낀다.
“오빠! 뭐해”
“왔어? 그냥, 구경하고 있었어”
남자는 들고있던 옷을 내려놓는다.
“오늘 원피스 사고싶다고 했지?”
그녀는 기세등등하게 눈을 부릅 뜨고는 인터넷으로 이미 보고 온 옷이 있다며 사진을 보여준다.
“어? 그 옷, 아까 본 거 같은데?”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마네킹 앞으로 데려간다.
“오? 눈썰미있는데? 이거 맞는거 같아”
여자는 원단을 만져보고, 거울 앞에서 마네킹과 나란히 서보기도 했지만, 곧 남자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여자는 방금전 남자가 내려놓은 크롭티를 가리키며 묻는다.
“그 옷, 입어 봤으면 좋겠어?”
“아냐”
“나 그 옷 못입어”
“왜?”
“나 배꼽이 없거든”
“무슨 소리야”
남자는 피식 웃으며 흘깃 여자를 보다가, 여자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묻는다.
“진짜로?”
“진짜야”
이내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리고 되묻는다.
“진짜로?”
“아 진짜라니까”
“어쩌다가? 아니 태어날때부터?”
“이상하게 들릴텐데..”
“이미 이상해”
“아니..그러니까 할머니가 장난쳐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어른들이 애기들 데리고 귀엽다면서 장난치는거 있잖아. 배꼽 먹을테야 이러면서 배에 얼굴도 비비고 그러 시는거”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여자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그럴줄 알았다는듯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간다.
“할머니도 자주 그러셨거든. 내가 귀엽다면서 배꼽 먹어줄까? 하시면서 내 배에 얼굴을 부비부비 비비시고는 하셨어. 그날도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장난을 치시곤 고개를 들어올리셨는데 아직도 기억나. 그 표정. 곤혹스럽게 일그러진 표정. 배꼽이 없어졌데. 그림판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애기 때 기억인데도 아직도 선명해. 당혹스럽게 내려다보시던 그 얼굴이”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난감해 한다. 남자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녀의 배 어딘가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봐도 돼?”
“응”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의 아래를 슬쩍 들춰본다. 으레 무언가 있어야할 그 위치에 이상한 공백만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진짜네?”
“진짜라니까”
“병원은 가봤어?”
“가봤지. 아무 일도 아니래. 가끔 이러기도 한데. 매듭이 자연스럽게 풀린거라나”
“그게 말이 돼? 아프진 않았어?”
“아무 느낌도 없었어. 사실 생각해보면 원래 여긴 아무런 느낌도 없잖아?”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장난치듯 그녀의 상의를 들춰보길 반복한다.
“하지마”
“미안해”
그는 장난을 멈추곤 뻘쭘하게 쭈뼛대다 이내 원피스를 가리키며 묻는다.
“그나저나 저 원피스는 안입어봐도 돼?”
“응 실물 느낌도 봤고, 어차피 인터넷으로 주문하는게 더 싸서”
“그럼 가자”
남자와 여자는 가게를 나와 거리를 걷는다. 남자는 괜히 윗배와 아랫배 사이 어딘가가 신경쓰인다.
“불편했겠다”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손가락을 접으며 말한다.
“첫번째, 수영장”
“왜?”
“왜긴, 비키니 입었는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거야. 이상하다는 듯이”
“혹시 동네 수영장에 비키니를 입고와서 이상하게 쳐다 본거 아니야?”
“농담하지마”
여자는 남자를 밀치며 장난을 친다
“두번째, 피어싱을 못 해. 구멍낼 데가 없어. 아쉬운데로 귀만 뚫었어”
“나는 그것도 그렇게 아쉽지 않네”
그리곤 세번째 손가락이 접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아, 또 있다”
여자는 웃으며 말한다
“복부 초음파 검사”
남자도 피식 웃는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간호사가 ‘배꼽에 젤 바를게요’ 하더니 멈칫 거리더라고. 배꼽을 못찾았나봐. 그러곤 아무 말없이 젤을 다른데 바르더라. 근데 배이긴 한데, 아랫배에 잘못 바르셨는지 의사선생님이 다시 발라주셨어”
둘은 함께 웃는다.
“그래서 배는 만지지 못하게 한거야?”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런거 같아”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를, 툭치며 말한다.
“그리고, 원래 여자의 배를 만지는건 실례야”
남자는 자신의 배꼽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근데, 이게 쓸모가 있나”
“그러게”
잠깐의 정적 끝에 여자가 다시 말한다.
“근데 생각해보면 사람의 상체와 하체의 구분을 배꼽을 기준으로 할 수도 있고..윗배가 아픈지, 아랫배가 아픈지 진단할 때 기준점이 될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적어도 배꼽인사는 할 수 있잖아. 선생님이 배꼽인사 해야지 할때 마다 나는 손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갈피를 못 잡았는걸”
“그럴수도 있겠다”
“이상해. 배꼽이 있어야하는 느낌인걸”
여자는 자신의 상의 속에 손을 넣고는 그녀의 매끈한 표면을 어루만진다. 남자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그런 생각은 왜 하는거야?”
“그냥. 얘기하다보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신경쓰지마. 넌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두 남녀는 한강둑 아래 내려가 강변을 따라 걷는다. 화창히 핀 꽃들 사이로 남자와 여자가 걷는다. 남자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한다.
“저기 예쁘다. 사진 찍어줄게”
여자는 벚꽃나무 아래로 총총걸음으로 달려간다. 벤치에 앉아 생기어린 눈웃음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본다.
“찍을게”
하나, 둘,
딸깍.
여자는 푹 하고 고개를 숙인다. 남자는 리모컨을 주머니 에 넣으며 여자를 향해 걸어간다. 주변을 한번 살피고는 여자 목덜미에 움푹 패인 부분을 지그시 누른다.
[오류 감지. 오류번호 H03. 재부팅 설정]
남자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푹, 내쉰다.
“저번에는 발톱이 안자란다고 하더니..”
순간 벚꽃 잎이 그의 입술에 달라붙는다. 남자는 괜히 놀라며 후 하고 달라붙은 잎을 털어낸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는 길을 바라본다.57
p.하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분명 초예술의 일부분이다. 정확하게는 ‘부동산에 부착되어 아름답게 보존되는 무용의 장물’이다. 이 물건들에만 초점을 맞춘 이름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봉해진 건조물이라는 뜻으로 ‘봉조물’이나 잊힌 건조물이라는 의미로 ‘건망물’이라는 이름도 생각했다. 도시polis의 불능impotenz이라는 의미로 ‘임폴리스impolis’로 할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모두 의미가 넘치거나 부족해 좀처럼 딱 들어맞지 않았 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토머슨’이었다. 그렇다. 마침 1982년 당시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로 있던 게리 토머슨 선수를 말한다. 선풍기라는 무례한 별명으로 불렸는데 따져보면 정말 그 별명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타석에 서서 붕붕 헛스윙을 이어가면서 끊임없이 삼진을 쌓는다. 거기에는 분명 제대로 된 몸체는 있었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기능이 없었다. 그것을 자이언츠에서는 돈까지 들여가면서 정성스럽게 보존하고 있었다. 참 훌륭하다. 비꼬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토머슨 선수는 살아 있는 초예술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58
q.드넓은 북쪽 수도에서 생긴 이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지금은 누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또한 코발로프 소령과 같은 사람이 자기 코에 대한 광고를 신문에 왜 내지 못했을까?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광고료가 비쌀 것이라는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계산적인 부류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불쾌하고 좋지 못한 일이다. 어떻게 코가 빵 속에 들어갔을 것이며, 또 이반 야코블레비치는 어떻게···? 아니, 그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작가들이 이러한 사건을 주제로 글을 쓸 수가 있나 하는 점이다. 솔직하게 이것은 규명하기도 힘들거니와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나로서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첫째, 이런 사건을 다루는 것은 국가적인 이익이 조금도 없을 것이고, 둘째도 역시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나로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하나씩 따져 보면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 비현실적인 것만은 사실 아닌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하게 무엇인가 내포되어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와 유사한 일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 많지는 않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59
r.디오니소스적 현실은 “우스꽝스럽고 치욕적인”, “구역질” 나는, “허위투성이의 가식”인 경험적 현실과는 구분된다. 오히려 디오니소스적 현실은 “모든 문명의 배후에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으며, 세대가 바뀌고 민족의 역사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근원적 일자”, “사물의 영원한 핵심인 물자체”, “존재의 핵심에 존재하는 영원한 삶” , “자연의 본 질”, “진리”의 현실이다. 즉, 디오니소스적 현실은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현실이 아니며, 그렇다고 “주위 관람석에 자리잡고 있는 교양인들”의 경험적 현실도 아니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든 무대 바깥에서든 모든 자연과 삶 그 자체를 “눈부시게 반영하는 신들이나 불멸의 피안”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이루는 코러스가 소요했던 곳이 바로 이 이상적인 땅이며 “죽음을 면할 길이 없는 인간들이 걸어다니는 땅보다 훨씬 더 드높이 솟아 있는 땅”, 즉 디오니소스적 현실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인은 “가공의 자연 상태를 나타내는 공중의 가설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공의 자연 존재”, 즉 코러스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이 세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상상력을 통해 삽입된 자의적인 세계”가 아니라, 신앙심 깊은 그리스인에게 올림포스산과 그 위의 신들이 그랬듯 “현실성과 신빙성을 지닌 세계” 였다. 코러스는 “신화와 제의에 의해서 성화된 종교적인 현실” 속에서 살고 있었다...사실 레서 도그는 플레이어가 그의 머리를 처음 쓰다듬는 순간부터 이미 친구가 되어 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단 한 번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바로 그를 ‘자비’ 로 살려 줄 수 있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적을 플레이어의 친구 로 만든 뒤에도 이렇게 끊임없이 쓸모없는 농담으로 UI 내부를 가득 채운다. 심지어 가득 차다 못해 UI의 한계 바깥으로 흘러넘치기 까지 한다. 그리고 당연히 레서 도그를 통해 선사되는 장난은 UI에 대한 플레이어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다. 그 누가 전투 화면 안에 나타난 개의 목이 무한히 늘어나 화면, 즉 UI의 경계 바깥으로까지 빠져나가리라고 예상하겠는가? 이에 그치지 않고 게임은 악랄한 선택지를 플레이어에게 장난치듯 제시한다. 플레이어는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늘어난 목의 길이만큼이나 깊은 친구가 된 레서 도그의 마음마저 배신하고 단칼에 그 목을 베어 죽일 수 있다. 『언더 테일」에서는 UI가 플레이어를 배신하고 플레이어가 NPC를 배신 할 수 있다...즉,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주변 공간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좁은 공간에만 접근할 수 있고 또 이 좁은 공간에서 모든 새로 운 것에 대해 경탄을 느끼지만, 점점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좁은 공간에서 새로웠던 것이 이제 넓은 공간에서는 별로 새롭거나 중요하지 않아 보이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만일 이 발견의 놀이가 끊임없이 재미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인간이 계속해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각 원리에 의해 오픈 월드 게임 속에 숨겨진 발견 요소들은 플레이어가 탐험하는 세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점점 지루하고 식상해진다...애초에 현실에서 플레이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500시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게 하는 원동력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오직 즐거움뿐이리라, 그리고 굳이 게임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어야 할 필요도 없겠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어떤 외부적 목적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움만을 끌어내기 위해 플레이한다는 지점에서만 예술과 궤를 함께할 수 있다. 아니면 예술이 게임과 궤를 함께 하든가, 물론 이 포섭과 범주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과 원리가 동일하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초에 예술 현상이 무슨 외부적 효용을 위해 벌어진단 말인가?60
s.자모표기법은 언어학을 기반으로 구성된 표기법으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글자가 되고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듯이 무용표기법에서도 기본 부호들을 여러가지 형태로 결합하여 움직임을 표기하는 구조이다. 무용표기법의 기호들은 춤동작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부호화한 것인데 춤 동작들을 크게 멈추어 있는 것(가짐)과 움직이는 과정에 있는 것(놀림)으로 구분한다. 즉 움직임을 형상화 한 30여개의 기본 기호를 발전시켜 이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보다 확장된 움직임을 표기하는 원리이다...하지만,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읽어낼수록, 과연 책에 담긴 춤의 원형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더 잘 독해할수록, 더 완전히 구현하려고 할수록, 높아지는 춤의 해상도만큼이나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어떤 괴리입니다. 반복을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차이. 책에 쓰여있는 기호의 의미가 명료해질수록 그 매끈함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것들이 감지됩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 연구의 대상이 이데올로기적 장막 너머에 있는 북한의 춤이라는 점에서 비롯되지만, 더 근본적으로 기호의 한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책과 기호는 춤과 몸을 담기에는 언제나 너무 작은 그릇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단계에서 우리의 작업은 책에서 춤을 읽어내는 일만큼이나, 기호에서 넘쳐흐른 춤과 몸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한 연구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프로젝트가 북한 무용의 정수를 온전히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춤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연구 대상을 남한에서 재연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대상화, 왜곡, 불가능성 같은 위험을 동반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성찰하면서 동시에 그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 혹은 전혀 반대 방향에서 북한의 예술적 체제가 믿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보려고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홍정화의 〈사관장과 전사들>이 아니라, 정다슬의 〈사관장과 전사들>이 되었을 때, 그것은 여전히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에 정치적 힘이 탈색된다면, 대체 어디에서 변화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북한에서 발행된 책에 담겨 있는 춤을 한국 무용, 현대 무용, 컨템포러리 댄스, 스트릿 댄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훈련된 몸을 가지고 있는 남한의 무용수들이 추었을 때, 심지어 춤의 원본이 책 그 자체일 때, 그 춤은 무엇이고, 또 누구의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같은 책을 두고서 같은 방식으로 읽어낼 수 없다는 점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 손에 주어진 북한에서 출판된 이 책이 진정한 의미의 공통체(the common)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이번 작업의 중요한 탐구 지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거듭된 연구를 통해 추어내려는 것은 북한의 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춤의 원본성, 춤의 존재론, 그러니까 춤과 몸, 춤과 말, 춤과 책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연구 방법론으로서 춤을 생각합니다. 기호로 변환되어 있는 이 춤을 해독하면서, 번역과 역번역 사이에서, 코딩과 디코딩 사이에서, 나아가 그것을 몸에서 몸으로, 말에서 말로 한 번 더 옮기면서. 그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을 다시 안무라는 형식에 주워 담을 수 있을까요? 그때, 춤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61
t.오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오염을 언어로서 감당하고 그 세계의 요동을 매개하는 것은 아주 지난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외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우리가 살아온 세계는 고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가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세계 끝으로 내몰아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자연스레 이미 세계 끝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를 먼저 탐색하고 바깥을 모색하고자 한 선구자들의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가 사용해왔던 말들을 부수고 그 부스러기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골몰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태양을 ‘가장 순수하고 가장 빛나는 것’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을 때는 그 어떤 그림자나 불순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태양이 부분적으로 불순하고 얼룩진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왜 그것을 ‘얼룩지고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부르지 말아야 하는가?
1922년 10월 만 레이의 사진이 처음 공개된 후, 같은 달 T. S. 엘 리엇은 『황무지』를 출간하며 먼지가 불러일으키는 실존적 공포에 대해 노래하고, 조르주 바타유는 그의 1930년 에세이 『먼지』 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연다: “작가들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먼지에 뒤덮인 채 깨어났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찢어질 음산한 거미줄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먼지에 대한 우리의 혐오는 너무도 커서, 우리는 그존재를 의식의 가장자리로 밀어내어 철저히 간과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다, 현대 사회의 문화는 결국 우리가 먼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시야에서 없애버리는가에 따라 발전한다...하지만 먼지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실마리는 없을까? 먼지에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다. 모든 사진가는 먼지와 애증의 관계를 맺는다. 먼지는 카메라 렌즈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소위 사진발을 잘 받는 존재다. 공기 중에 떠있는 먼지 입자는 빛을 받아들이고(대기가 오염될수록 석양은 더욱 깊고 짙어진다), 단단한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는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찬미하는 고르고 부드러운 윤광을 남긴다. 무엇보다도 먼지는 영원하다.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지구에서 사라져도 먼지만은 집요하게 살아남는다. 바타유는 그의 에세이를 다음과 같이 맺는다: “언젠가는 먼지가 가정부들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어 버려진 건물들의 광대한 폐허, 버려진 조선소를 침범할 것이다. 그리고 먼 미래에는 그 악몽을 막을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그의 중대한 1966년 저서 『순수와 위험』에서 오염의 개념이 인간 문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염은 사회 이면에서 작동하는 구분 체계를 거스르는 관념 또는 행위로 정의되는데,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사회의 질서에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할 위험 요소로 간주된다. 정원의 흙은 더럽지 않지만, 집안의 방바닥에 뿌려진 흙먼지는 불결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오염은 물질이나 대상 자체의 순수성(또는 불결함)과는 관계없이, 경계선에 관한 우리의 기대치에 의해 조정되는 개념이다62
u.2023년 4월 동물권 단체 A는 소셜 미디어에 ○○역 인근 수색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거리 홈리스로 추정되는 남성과 줄을 매지 않고 그를 따라다니는 개두 마리를 찾는다는 글을 게시하였다. 이어 A단체는 거리 홈리스의 개들을 무사히 구조하였으며 동물병원에 도착하여 검진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같은 해 7월 ‘동물 단체에게 키우던 강아지 2마리를 빼앗긴 ○○역 노숙인입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영상에 출연한 남성은 A단체가 구조한 개 두 마리는 자신의 ‘반려견’이며 A단체는 치료를 명목으로 데려간 후 돌려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단지 개 두 마리가 ‘보호자’의 의사에 반하여 구조된 사건이 아닌, 동물권 문제와 도시 성원권 문제의 첨예한 접점을 드러내며 권리 담론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한다. 거리 홈리스의 반려 경험에 관한 공식 통계가 존재하지 않고 동물권 단체가 거리 홈리스의 개를 구조하는 일이 흔히 발생하는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이 연구는 2010년대 이후에 나타난 유사 사건들을 하나의 경향성으로 파악하여 이를 ‘거리 홈리스의 개’ 문제로 명명하고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이 문제가 품은 아포리아는 다음과 같다. 거리 홈리스와 그/녀의 개 중 누구의권리를 지지해야 하는가를 묻는 구조로 들어가기 쉽다는 점이다. 즉 거리 홈리스의개를 구조하는 것이 비/윤리적인가 거리 홈리스가 개를 키우는 것이 비/윤리적인가를 묻게 만든다. 이러한 아포리아의 물음을 이동시키고 정교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연구 물음을 제기한다. ‘좋은’ 반려인과 ‘좋은’ 시민의 표상은 어떤 관계인가?
C단체를 통해 유기견을 입양한 김예진은 지역에 거주하며 개를 돌보았던 경험을 회상하며 그때는 ‘반려’라는 “세련된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도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돌봄을 제공하지도 않았지만 그 개는 무척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다고 말하였다. 산책할 때 줄이라는 ‘제약’이 존재하지 않았고, 원한다면 혼자 산속을 산책하다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예진은 서울에서 소리를 같은 방식으로 키우려면 그 정도의 “땅을 가진 지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김예진의 말은 ‘공공 공간의 결핍’이라는 한국 도시 문제를 관통한다. 공공 공간의 결핍은 절대적인 면적의 문제라기보다 공간을 기능에 따라 소비해야 하는 도시 생활 양식의 문제와 관련된다. 공공 공간의 결핍은 “반세기 동안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압축 도시화의 어두운 단면이다. 격렬한 속도로 공간을 생산했으나, 그만큼의 공간이 사라졌다. (…) 국가와 시장이 공공의 이름으로 ― 때론 공공의 이익이 되는 발전을 명목으로 ― 진행한 공간 생산의 결과가 공공 공간의 결핍이다63
v.11 The table is a roof that covers a programme. It does not merely shelter what we see. It also hosts a world of machines. We are fascinated by their shapes and the way they need care and sometimes protection. They are vulnerable and intriguing creatures of our technical era.
20 The roof is not a purely utilitarian device. It offers protection, and a glimpse of the sky. It forges a relationship with the elements. It is an invitation to get closer to what remains unreachable.64
w.노스탤지어를 상실했던 무언가가 마음속 또는 현실에 잠시 돌아왔을 때에 느껴지는 감정으로 정의한다면, 과거가 현재 속에 지속해서 존재하는 동시대의 현상은 ‘노스탤지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채색은 우리를 과거 가까이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되레 현재와 과거의 간극을 넓힐 뿐이다. 직접성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과거의 기록에 있어서 정직함의 요소를 저버리면 과거는 더욱 머나먼 것이 되어 버린다. 젊은 세대가 전쟁의 의미를 이해하게 돕는다는 목적은 좋지만 이를 위한 올바른 방법은 그 영상들을 만들어진 그대로 보여 주고, 보는 이의 노력을 통해 그 영상의 가치가 무엇이고 그 시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지난주에 찍은 것처럼 보이는 영화는 지난주의 영화일 뿐이다.65
x.“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되묻는 소리가 나왔다. 아저씨는 점퍼 지퍼를 제일 위까지 올리고, 나는 부지깽이를 고쳐 잡았다.
“예년 같으면 슬슬 계절풍의 방향이 바뀌고, 새싹이 움트고, 바닷빛이 밝아질 무렵이야. 그런데 올해는 아직까지 눈이 이렇게 남아 있지. 아무래도 이상해.”
“하지만 삼십 년에 한 번은 이런 이상기후도 오잖아요?”
“아니.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생각해봐. 달력이 사라졌으니 한 달이 끝날 때 그 장을 쭉 찢어낼 수 없잖아. 즉,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에게 새로운 달은 오지 않아. 봄이 오지 않는 거야." 할머니는 털실로 짠 보호대 위로 무릎을 쓰다듬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된다는 거요?”
“봄이 오지 않으면 여름도 안 온다는 건가? 밭이 눈에 덮여 있 으면 어떻게 농작물을 키우지?”
“계속 추울 거라니. 지금도 연료가 부족할 판인데.” 사람들이 저마다 불안을 드러냈다. 한층 싸늘한 바람이 길 맞 은편에서 불어왔다. 진흙으로 더러워진 차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괜찮아. 너무 지나친 생각이야. 달력은 그냥 종잇조각이잖아.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괜찮아, 괜찮아.”한때 모자 장수였던 아지씨가 스스로를 타이르듯 되풀이해 말했다.
“그래. 맞아.”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결국은 무릎이 안 좋은 할머니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봄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달력의 재와 함께 눈 속에 갇힌 것이다...오른팔이 소멸했을 때는 사람들도 지난번만큼 당황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침대 속에서 끙끙대거나, 옷을 입을 때 어떻게 다물지 몰라 애를 먹거나, 처분할 방법을 고민하거나 하지 않았다. 조만간 이런 사태가 발생하리라고 다들 예상했다. 필요 없어진 ‘물건’을 들고 나와서 광장에서 불태우거나 강에 떠내려보내야 하는 수고를 던 만큼 몸의 소멸은 보다 조용하고 담담했다. 웅성거림도 혼란도 없었다. 그저 새롭게 생긴 구멍을 끌어 안고 평소대로 아침 채비를 할 따름이었다. 물론 생활 속 작은 변화들은 생겼다. 매니큐어를 바를 수 없어 졌다. 왼손만으로 치는 새로운 타자법을 고안해야 했다. 채소 껍질 을 벗기는 데 전보다 시간이 걸리게 됐다. 오른손에 낀 반지를 왼손으로 옮겼다···어느 것이나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덮쳐오는 소멸의 파도에 몸을 맡기면 제자리를 찾아 자연스럽게 실려가는 법이다.66
y.마샬 맥루한은 『인간확장의 원리, 미디어 이해』에서 미디어가 인간의 이미지를 일변시키고 사물의 가치 개념이 크게 변화될 것을 예언했는데, 건축이나 디자인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다 반대 쪽에서 일어난 디자인 운동이 잡지라는 미디어를 통해 일본 디자이너들의 눈에 전달되고, 그 첨단적인 사고와 아름답게 연출된 비주얼 메시지가 젊은 디자이너들의 의식 속에 깊게 침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문화의 이미지를 보는 것에서 나아가 점점 스스로의 문제로 다루기 시작하게 되었다. 부러움은 곧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들도 할 수 있다’ 라는 생각과 같이 동시대화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하여 급속한 의식 변화를 가져왔다. 더 나아가 미디어를 통해 전하고 싶다는 자발적인 태도로 변해갔다. 이미 미디어에 대한 여러 아포리즘이 사람들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미디어는 메시지, ‘모든 메시지의 ‘내용’은 또 하나의 미디어이다’와 같은 말은, 그때까지는 수신자였던 디자이너에게 스스로 미디어 라인에 올라탈 것을 강하게 의식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먼 존재였던 미디어 히어로들과 적어도 미다어 상에서만이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디자인을 하는 결과로서의 목적으로 변해갔다. 더구나 ‘매스미디어’ 그 자체도 선별의 대상이 되었다. 상위에서 하위까지, 전문부터 대중까지 세분화되었고, 컬처 히어로와 통속적인 히어로가 모두 미디어를 통해 배출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디자인의 본질적인 의의가 전도되었다. 실제로 보고 경험한 것보다는 사진상의 효과나 연출을 위해 첨단적이고 포토제닉한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변해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버블경제는 일상생활의 축을 여가 쪽으로 옮겨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은 '일상성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이다. 온화한 삶의 풍요로움, 일상생활의 깊이, 매일매일을 반복하는 안정감 가 족, 친구와의 커뮤니케이션 등의 ‘일상의 아름다움’이 상실된 것이다. 이러한 사태 전부는 디자인, 특히 공간=장소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공간 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 및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시간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시간을 보증한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한 관계’인 것이다
일본의 패션 디자인이 제안한 요소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옷의 컨셉. 이세이 미야케가 명쾌하게 보여준 것처럼 한 장의 천을 유기적인 옷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옷의 새로운 개념이다. 서양의 옷이 여성의 몸을 조형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체형을 무시하는 가와쿠보 레이의 평면 구성의 옷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아름다움, 새로운 충격이 느껴졌다.67
z-1.플레이리스트는 주로 여행 동반자가 선택했는데, 리스트에는 클레르 드니 감독의 「정오의 별」(Des étoiles à midi, 2022년) 사운드트랙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라 영화에 앞서 사운드트랙을 먼저 듣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 앨범을 리스트에서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여행 동반자는 사운드트랙이 영화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지만,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영화 보는 즐거움을 감산하지 않기 위해 영화의 예고편도 미리 보지 않는다. 약간의 실랑이는 결국 내기로 이어졌다. 우리는 사운드트랙만으로 영화의 내용을 얼마만큼 미리 그릴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1번부터 19번까지 이어지는 트랙을 들으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미리 본 영화는 다음과 같았다. “습도 높고 기온 높은 남반구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로 추정되며, 밤과 자동차 장면이 많이 보인다. 디제시스(diegesis)의 뼈대를 이루는 갈등이 일종의 범죄와 연결되는 스릴러 장르지만, 그렇다고 명확한 범죄가 일어난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날 저녁 숙소에 서 영화를 확인한 후, 나는 내가 내기에 이겼다고 주장했고, 여행 동반자는 그 정도면 영화 예고편을 본 것에 비견할 수 있다는 내 주장에 승복했다. 그만큼 「정오의 별」의 사운드트랙은 디제시스에 매끄럽게 맞붙는다.
음악은 유용한가? 음악학자 스티븐 현턴은 이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용함’과 ‘음악’은 동어반복(tautology)이거나 모순(oxysmoron)이라는 것이다. 서양 음악의 담론 안에서 음악은 기능으로부터 해방되어 온전한 자율성을 약속받는 듯 보인다. 그 러나 콘서트홀 밖 현실에 서식하는 음악이 실상 기능과 무관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조금 전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를 안에서 감상되던 베토벤 교향곡도, 콘서트홀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로드 트립의 배경 음악으로 변모할 수 있다. 분위기를 띄우거나, 상처를 위로하거나, 어색함을 완화하거나, 환영을 촉진하거나, 무언가를 부연하거나, 소속감을 높이거나, 생산성을 증진하기 위해 소비되면서, 음악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기능해 왔다.
애초에 음악은 기능과 동의어였을지 모른다. 아주 오래전 음악은 주술, 소통, 연대의 도구에서 출발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종교, 의식, 의례와 맞물려 서서히 체계를 구축했다. 어느덧 음악은 일상적 유희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에리크 사티가 「가구 음악」(Musique d’ameurblement, 1917년)을 발표했는데, 기능 음악을 지향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이 곡은, ‘기능하느라 들리지’ 않는 음악의 현실 을 비틀며 사실상 음악의 ‘가구-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상정한다. 하지만 「가구 음악」은 거실에 배치된 가구처럼 공간을 자연스럽게 채우는 음악이라는 (뒤틀린) 개념을 배양했고, 이후 ‘뮤작’(Muzak)이라는 이름으로 재발명되어 20세기 전반에 스며들었다. 엘리베이터 음악이라고도 불리는 뮤작은, 말 그대로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에서 어색한 침묵을 채우는 것과 같이, 일상에 배경처럼 삽입되어 기능하는 ‘환경 음악’이다.68-1
z-2.오민: 감각 재료(빛, 소리, 형태, 색, 신체, 운동, 물질 등), 기술 재료(도구, 기계 장비, 신체에 집적된 수행 능력, 기술의 시대성 등), 형식 재료(장르별, 시대별 형식 등), 사유 재료 (주제, 질문, 가정, 관념, 내용 등), 역할 재료(작가, 수행자, 기술자, 운영자, 관람자 등)" 등으로 분화되는 모든 창작 질료는(오민 “선형적 시간은” 81쪽 발췌)
오민: 모두 동일한 ‘지평’에 놓인다.
화이트헤드: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동일한 지평에 있는 것이다(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78쪽 발췌)
들뢰즈: 동일 층위에서 다른 지대들을 구성하고 서로 접속 가능한 문제들에 응수하면서 ‘함께-창조하기’에 동참한다(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철학은 무엇인가”, 23~4. 이정하 “몽타주” 385페이지에서 재인용).68-2
z-3.흥미롭게도 음악에는 연습과 공연이 중첩되는 연습곡(études)이라는 장르가 실제로 존재한다. 연습곡은 특정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작곡된 짧은 교본에서 출발했지만, 쇼팽 이후 인기 있는 콘서트 곡으로 발전했다. 무대에서 연주되는 연습곡은 공연의 본질인 ‘되기’(becoming)를 실현하며 연습과 공연 모두를 개념적으로 성립시킨다.
2018년 나는, 줄리아 울프의 「릭」(Lick)을, 새로 발표하는 퍼포먼스의 제1막으로 무대에 올렸다. 당시 연습과 연주가 중 첩된 상태를 연구하던 터라, 「릭」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출판사 에게 공연에서 「릭」을 '연습'해도 되는지 문의했다. 물론 안 된다는 답을 받았다. 반드시 악보에 적힌 작곡가의 의도대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습을 공연하도록 허락하리라 예상하진 않았지만, 막상 안 된다는 답변을 듣고 나니 질문이 이어졌다. 애초에 작곡가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 연습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각각의 연습 단계에서 연주자들은 작곡가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 않나? 연주가 작곡가의 의도를 충족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연습과 공연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또한 무엇인가? 작곡가의 의도란 무엇인가?
작곡가의 의도는 악보에 기록된다. 그러나 작곡가가 상정한 이상적인 소리가 매우 신중하게 사전 결정되고, 또 악보가 그 소리를 세심하고 명확하게 지시한다 해도, 그에 대한 해석은 언제 나 다양한 방향으로 열리기 마련이다. 퍼포먼스를 수반하는 작품을 제작하며 스코어를 작성할 때마다, 나는 독일 역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의 말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진다. “(자명한) 도식의 칸트적 승리를 지향할 것인가, (발견적) 변덕에 의한 니체적 고통을 지향할 것인가?”(디디위베르만, “이미지 앞에서” 발췌)
나가오: 춤이란, 일상에서의 사회적 허용과 관련된 특정 상태를 의미한다. 일상에서 잘 하지 않는 행동은 춤과 잠재적으로 연결된다. 춤출 수 있는 곳과 출 수 없는 곳, 또한 춤을 추고 싶은 곳과 추고 싶지 않은 곳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춤 역시 정의된다.68-3
z-4.오민: 극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소리로 구성된 작품들도, 악보를 보면 그 소리들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편적인 무보 체계를 포기한 듯 보이는 안무가들과 달리, 작곡가들은 몇백여 년에 걸쳐 보편적 체계로 다듬어진 오선보를 이용하여 미리 확고하게 결정한 소리들을 언제든 재활성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케이지는 '우연'을 새로운 음악 재료로 소개하면서 작곡 안에 확립된 ‘결정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촬영 현장에서 나는 케이지적 비결정의 순간을 종종 맛닥뜨린다. 롱테이크를 사용할 때 특히 그렇다. 앙드레 바쟁과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é)의 추종자들은 롱테이크를 선호했는데, 이는 진실한 세계를 재현하는 기록이 영화의 의무이자 아름다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몽타주는 인간의 의도를 개입시키며 진실을 왜곡하는 것일 수 있다. 나도 롱테이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불안을 배양하기 위함에 가깝다. 나는 일련의 움직임을 가정적으로 안무하면서 특정한 세계를 먼저 상상한다. 그러고 나서 이 움직임들이 실현되는 것을 롱테이크로 기록함으로써 ‘유일한 현존’이라는 퍼포먼스의 핵심적 개념을 필름에서 발생시키고자 노력한다. 안무가 복잡할수록 발생하는 현실은 점점 더 통제하기 어렵고, 계획이 치밀할수록 역설적으로 비결정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며, 숏이 길수록 불안은 증대된다. 롱테이크는 유약하다. 하지만 모든 피포먼스는 애초에 유약하다
오민: 그렇다면 최근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무엇인가?
뵈네: 아마도 영화 유물론 아닐까? 현재 영화 연구 분야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영화 유물론에 접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전통적 실험 영화의 실천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날로그 필름의 물질성, 그리고 그것이 물질적 존재로서 세계와 맺는 관계다. 예를 들어 필름을 바다에 던지거나 땅에 묻은 데이비드 개튼, 루이스 버크, 제니퍼 리브스, 에마뉘엘 르프 랑과 같은 작가들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실천은 미디어의 물질적 존재를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환기한다. 영화 유물론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이들 모두 영화를 보다 큰 생태계의 일부로서 다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이들 모두 이미지가 등장하는 모든 단계에서 영화가 세계에 접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환경적 비용을 포함하는 제작비에 관한 질문이나, 아날로그, 디지털 할 것 없이 영화가 물질과 관계하는 창의적 방식에 관한 질문 모두, 이 맥락 안에 있다…우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위 인류세라 불리는 이 시대에, 형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 즉 비인간의 형상을 보고 또 형상을 비인간으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68-4
z-5.인류사에는 수많은 기계가 등장했다. 영화는 20세기의 대표적 기계 중 하나다. 영화라는 거대한 기계를 구성하는 장치는 종종 신체와 비견된다. 카메라는 ‘키노아이’로, 카메라가 포착한 이미지는 ‘뉴 비전’으로, 그 이미지들을 절단하고 재접합하는 기술인 몽타주는 ‘사유 기계’(thought-machine)로 불렸다. 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20세기의 기계들은 리모컨 버튼을 누르고, 하이퍼링크를 클릭하고, 이미지를 슬라이딩하고, 방대한 절단면들을 몽타주하며 일상을 보내는 21세기 동시대인을 산출했다. 그리고 21세기의 동시대인들은 이 시대의 가장 막강한 기계인 생성형 알고리즘에 생각을 의탁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생물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기계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어쩌면 이것은 그리 놀랄 일도, 또 새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언젠가부터 인체, 기계, 생각, 장치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68-5
a.(유령과 기계의 암투)69
b.이 학자들이 두 범주로 구분 한, 야콥센이 건축에 대해 언급한 용어들의 성격을 보자.
신고전주의: 기억하려는 노력, 의미는 기원으로서 존재함, 역사적 풍요로움, 완성으로서의 완전함, 닫힌 위계적 조화의 관점, 영원한 정적 및 구조적 균형, 영원한 재생을 통한 죽음 극복과 확고한 평온을 나타내는 수사적 공식, 반신적 근원 특성이 물질적 세계에 구현된 듯한 물질 효과, 신성하게 부여된 형상으로서의 신체와 건물의 부피.
모더니즘: 구체적 실재에 대한 매혹, 역사적 유산을 잊고자 하는 욕망, 형이상학적 부재/존재가 아닌 산업 제품의 익명성을 표현하는 표면 창출,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호로서 작동하고 기능적인 해결책에 대한 지향, 절대적 완성이 아닌 역동적 완전성, 목적에 대한 절제된 지향, 기술과 통합된 자연관, 운동에 의해 균형이 전복되는 관점, 개방성과 혁신, 지속적으로 혁신되는 구성 원리, 건축물을 통과해 움직이는 자연 유기체로서의 신체에 대한 관점. 야콥센의 작품은 추상적이고 기술적으로 완성된 화이트 모더니즘과 덴마크 전통의 수공예적이고 촉각적인 감각 사이의 영역에 존재했다. 분명한 것은 야콥센은 차갑고 엄격한 모더니스트의 정합성을 맹목적으로 좇기보다는 언제나 우아하고 예술적인 생명감과 사람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세계를 선호했다는 것이다.
문케고르 체어는 학년별로 서로 다른 몸집을 가진 학생들을 고려해 세 가지 크기로 제작되었다. 이 의자들은 다음 장에서 살펴볼 그의 유명한 앤트 체어에 뒤이어진 셸 타입 의자였다.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성형 합판 기술로 제작된 이 의자는 어린이들이 쉽게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기능적이었으며, 현대적인 학교의 분위기와도 완벽하게 어울렸다. 가벼움은 미학이기도 했지만 권한의 분산이기도 했다. 의자가 가벼워질수록 교실의 주도권은 교사에서 학생에게로, 권위에서 사용으로 이동한다. 형태의 출발점도 몸의 시나리오다. 등받이는 몸의 굴곡에 맞게 적절한 곡선을 가져 편안함을 만들기도 했지만, 또한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어린이들의 자세- 앉기, 돌아보기, 쓰기, 그리기, 서서 발표하기-를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보다 자유로운 몸짓이 가능해지면 몸은 여러 방향으로 열리고, 여러 작은 섬의 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의자는 여기서 민주주의의 사물이 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의자는 배움의 의미와 방식, 리듬을 바꾸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당연한 말이지만,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진 무언가다. 누군가는 그것이 아름다운 사물이기 때문에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기능과 아름다움이 의자의 전부일까?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우리의 몸짓이 타고난 본능이라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배우는 기술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앉고, 서고, 눕고, 달리고, 헤엄치지만 ‘어떻게' 그러한가 묻자면 시대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또 때에 따라서 너무 다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는 저마다의 관습이 있다. 모스는 잠자기를 한 예로 든다. 어떤 사회는 잠자기 위해 취침 도구를 쓰고, 어떤 사회는 땅바닥에서 잔다. 또 어떤 사회에서는 서서 자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몸짓을 배우고, 배운 몸짓을 수행하며 다시 사회를 재생산한다.
건축가들의 의지는 언제나 구축적인 것과 관련한다.심지어 반구축적인 건축을 표명할 때조차 구축적이다. 총체 예술이 건축을 중심으로 전개된 건, 건축적 사고가 하나의 장소 전체를 구축하기 위해 도입되는, 현실의 복잡함을 감당하는 능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소를 짓는다는 것은 장소의 안팎과 앞뒤, 이전과 이후,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관련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70
c.“아득한 옛날”, 인간이 처음 일을 시작한 시점에는 일의 이 세 측면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자명하지만, 주술사 자신에게 있어서는 주술의 존재론적, 윤리적, 기술적 측면들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확히 이들의 분화가 일어났을 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가 등장했다. 역사는 이 세 갈래 분화의 전개 과정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 첫 단계(고대와 중세)에 역사는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Sein-Sollen/를 강조한다. 말하자면, 사람은 어떤 가치-윤리적, 정치적, 종교적, 실용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한마디로 ‘경건한 믿음 속에서’ 일한다. 그 두 번째 단계(근대)에 역사는 세계라는 존재의 발견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사람은 인식론적, 과학적, 실험적, 이론적으로, 한마디로 ‘믿음 없이’ 일한다. 그 세 번째 단계(현재)에 역사는 방법을 강조한다. 즉 사람은 기술적, 기능적, 효율적, 전략적, 사이버네틱스적으로, 한마디로 '의심이 가득한 채' ‘절망적으로' 일한다. 첫 번째 단계에는 목적 지향적 질문('무엇을 위해?')이, 두 번째 단계에는 인과관계 질문(‘어째서?’)이, 세 번째 단계에는 형식적 질문(‘어떻게?’)이 지배한다. 역사는 그러니까 일의 세 가지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고전시대의 (관여되어 있는 /engagiert/) 일, 근대의 (탐구하는) 일, 그리고 동시대의 (기능적인) 일이다…인류 대다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일에 도구로서 중사한다.
왜냐하면 '효과적인 것'으로 '선한 것'과 '진실한 것'을 밀어낸 결과를 우리가 지금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아우슈비츠와 원자폭탄과 온갖 기술 관료 체제 같은 잔인한 형태들에서 본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조 분석, 사이버네틱스, 게임 이론, 생태학 같은, 보다 미세한 형태의 사유에서 그것을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정치와 과학에서 방법으로 관심이 옮겨진 곳에서, 가치를 향한 모든 질문은, ‘물/物/자체 Sache selbst’에 대한 모든 질문과 똑같이 경멸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윤리학은 존재론처럼 무의미한 담론이 된다.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들이 대답을 가능하게 하는 아무런 방법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답의 토대를 세울 방법이 없는 곳에서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엄밀히 말해서, 그러니까 모든 일이 불가능해졌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이 무의미하다면, 일하는 몸짓이 부조리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일은 기능하기 /das Funktionieren/로 대체되었다.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실현하거나 현실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는 어떤 기능의 담당 직원 /Funktionar/ 역할을 한다. 이 부조리한 몸짓은 기계를 관찰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는 어떤 기계의 기능으로서 역할 하기 때문이다. 그 기계는 어떤 직원의 기능으로서 역할 하고, 다시 그 직원은 어떤 장치 /Apparat/의 기능으로서 역할 하고, 그 장치는 그 자체의 기능으로서 역할 한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개인적 헌신으로, 즉 장치의 기능으로서 역할 하면서 그 장치를 사랑하는 것이다(이것은 출세하는 우수한 관료이다). 자포자기 상태로, 즉 물러날 때까지 장치 내부에서 원을 그리며 맴도는 것이다(이것은 대중문화의 인간이다). 하나의 방법으로, 즉 내적인 피드백과 다른 장치들과의 통합에 의해 자신의 기능을 변화시키면서도 장치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다(이것은 기술 관료이다). 항의의 태도로, 즉 장치를 혐오하고 파괴하려 한다. 그 시도는 장치에 의해서 만회되고 장치의 기능 속에서 변형된다(이것은 테러리스트이다). 희망에 차서, 즉 장치에 구멍을 뚫기 위해서 그것을 서서히 해체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기능하기'의 양을 줄임으로써,'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인데, 삶의 질은 자동적으로 장치의 새로운 기능이 된다(이것은 환경론자, 히피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기능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일 /Arbeit/의 몸짓은 기계 너머에서 부조리해진다는 것, 그 이유는 가치에 대한 질문이 의미를 잃은 탓이라는 사실을 피해가지 못한다…방법이 존재와 당위를, 기술이 과학과 정치를 집어삼키면, 부조리가 파고들기 때문이다. 방법을 위한 방법, 목적 그 자체로서 기술, 그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 어떤 기능의 기능으로서 작동하는 것, 이것이 탈역사적인 /nachgeschitlich/, 일이 없는 삶이다…기계 너머에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71
d.차차 알게 되겠지만, 기이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 무엇이다. 기이한 것은 친숙한 것을 통상 그 너머 에 놓여 있는, 그리고 ‘홈리'한 것과 양립할 수 없는 무언가 로(심지어 정반대의 무언가로) 이끈다. 기이한 것에 가장 적합한 형태는 아마도 몽타주-서로 어울리지 않는 둘 이상의 것들을 결합하는 기법-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초현실주의 내에서 무의식을 선호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을 몽타주 기계, 기이한 병치들의 원천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자크 라캉이-초현실주의와 미학적 모더니즘의 잔재에 의해 제기된 도전에 맞서- 기이한 정신분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죽음 충동, 꿈, 무의식은 그 어떤 자연법칙이나 안정감과도 동떨어져 있다…으스스한 것은 사람의 흔적이 부분적으로 사라진 풍경에서 보다 쉽게 발견된다.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이렇게 파괴되었을까, 이렇게 사라졌을까? 어떤 존재가 관련되었을까? 무엇이 이토록 으스스한 비명을 내질렀을까? 이런 예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으스스한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결부된다. 어떤 주체가 기능하는가? 주체가 있기는 한가? 이런 질문들은 정신분석적인 영역-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누군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인가-에 적용될 수도 있지만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힘에도 적용된다. 자본이란 모든 면에서 으스스한 존재이다.
이는 러브크래프트가 그의 대다수 소설에서 뉴잉글랜 드를 배경으로 한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해 준다. 러브크래프트의 뉴잉글랜드는, 모리스 레비가 언급하기, "현실-물리적, 지형적, 역사적-이 역설되어야만 하는 세계"이며 "잘 알려진 대로, 진정한 환상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는 불가능한 것이 시간과 공간을 뚫고 객관적 으로 친숙한 현장에 난입할 수 있는 곳"이다…그렇다면 기이한 것을 결정짓는 요소는 외부 세계의 무엇이 이 세계에 침입했는지 여부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나 드라마 역시 문, 커튼, 입구에 집착한다. 추후 살펴보겠지만,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인랜드 엠파이어는 세계간 문턱에 구성된 구멍 뚫린 공간, 존재론적인 토끼 굴로 나타난다. 때로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턱이란 단순히 재설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는 당신이 충분히 작아지기만 한다면, 당신의 거실이 바로 기이한 충격과 공포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72
e.무젤만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극심한 기아와 탈진으로 거의 아사 상태에 이른 수감자들을 지칭하는 은어이다. 이 용어는 독일어로 ‘무슬림'을 의미 하는데, 이는 굶주린 수감자들이 다리 근위축으로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엎드려 있는 모습이 이슬람교도의 기도 자세와 유사한 데서 붙여진 이름 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Homo Sace)」(1995)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Quel che resta di Auschwiz)」(1998)에서 무젤만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는 무젤만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놓인 형상이라고 해석한다. 아감벤은 바로 그러한 이유, 즉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된 '비인간'으로서의 무젤만이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보았다.
여기서 아포리아는, 최고의 사유는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을 수도 없고 뭔가를 사고할 수도 없으며, 잠재적 상태에 머물 수도 없고 현실성으로 넘어갈 수도 없으며, 쓸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려,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사유라는 그의 유명한 테제를 언표한다. 이는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음과 뭔가를 사고함 사이의,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의 일종의 중간 지점이다
아감벤은 이를 변형해. 오늘날의 인간은 “저 자신의 비잠재성에서 분리되어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험을 박탈”당했다고 진단한다. 이는 보다 은밀하고 본질적인 권력의 작동 방식으로 해석된다. 아닌 게 아니라 단순히 ~을 할 수 있음의 잠재성에서 분리된 존재는 ~을 하지 않을 수 있음이라는 소극적 가능성을 통해 저항할 수 있지만, ~을 하지 않을 수 있음마저 상실한 존재는 저항할 능력 그 자체를 잃는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나아가 ~을 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박탈당할 경우에는 무엇이든 ~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강제 속에 포획된다. 반대로 ~을 하지 않을 수 있음을 통해 우리는 '우연성'을 사고할 수 있게 되며, 필연의 권력 장치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잠재적 힘을 갖게 된다.
아감벤의 말마따나 굴드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충동에 따른 음악적 실천이라고 본 것이다. 굴드는 오히려 수십 차례의 테이크를 편집, 믹싱하고 피아노 소리를 튜닝함으로써 라이브 연주에서는 선보일 수 없었던 잠재력을 현실화했다. 그렇게 완성된 굴드의 대표적 앨범이 <골드베르크 변 주곡Goldberg Variations BMW 988>이다. 굴드는 전통적 바흐 해석의 관행을 벗어나 단순히 ‘음표를 제대로 연주하는 능력’을 넘어 ‘음표를 전통적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연주 방식에 대한 비능력’을 행사했다.73
f.나는 형식을 드러내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 형식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인정하고 무엇이든 침투가능한 상태로 존재하게 만드는데 또한 관심이 있다.
g.언덕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하
고 싶은 모든 색으로 이루어진 언덕 무더기.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언덕들이다. 크
기는 제각각이지만, 형태는 언제나 동일하다. 오직 하
나의 형태. 아래는 두껍고, 옆으로는 부풀어 있고, 위
는 평평하고 둥글다. 그러니까 소박하고, 익숙한 언덕
들. 우리가 항시 떠올리지만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그런 언덕들.
텍스트와 이미지, 소리와 의미, 형상과 여백이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가 창조될 수 있다고 본 칸딘스키는 여러 방식으로 공간, 색채, 형태, 보는 행위에 대한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던지며 다의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세계를 제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객관적인 표현을 극복하기 위한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말과 기수는 작가의 주요 모티프로 발전하게 되기도 한다. 「울림들」을 함께 번역하고, 편집하고, 디자인하며 이 책이 명료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기보다, 어떤 체험을 유도한다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다. 논리적으로 연결된다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음악적인 흐름을 따르는 듯한 이미지와 단어를 의미로 포획하려 하지 말고, 단어와 단어, 단어와 이미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공백이 만들어내는 박자와 진동을 자연스럽게 타보길 바란다. 같은 말, 비슷한 상징이 되풀이되는, 그래서 자꾸만 뜻을 놓치는 자리에 생겨나는 모호한 느낌은 아마도 읽는 이의 고유성으로부터 메아리치는 울림들일 것이다.74
h.그런데 그 곰들 중 특별한 한 마리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 곰이 김천에 있는 수도산으로 계속 도망을 간다는 것이다. 환경부 측은 왜 곰이 자꾸 80킬로미터나 떨어진 수도산으로 가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입장이며, 이 곰을 잡아다가 다시 지리산에 풀어놓기를 반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 고집 센 곰은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수도산을 향해 달렸고, 버스에 치이는 사고까지 당했다. 결국 환경부는 이 집요한 곰에게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곰이 그토록 원하는 수도산에 살도록 내버려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수도산에 살게 된 이 곰의 이름은 KM-53이다.75
h-1.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어이없이 강도를 당한 적이 있다. 다행히 용의자가 붙잡혀서 재판에 나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게 되었다. 강도가 흑인이었다는 내 증언에 용의자 측 변호사는 "어떤 피부색의 흑인이었나요?"라고 물었다. 흑인이라는 표현이 이미 특정한 피부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호사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검은색이었다니까요. 그냥 흑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흑인도 커피 갈색, 옅은 갈 색, 진한 검은색, 푸른 검은색, 혹은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 등 피부색이 다양하다고 말하면서 ‘그냥 흑인’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에서 온 내가 흑인에 대해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범인이 흑인이었다는 내 증언이 유효하지 않다는 반론을 펼쳤다. 다행히 그 변호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나에게 매우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바이런 킴의 도전은 자신의 문화 정체성, 존재에 대한 탐구 속에서 더욱 확장된다. 바이런 킴이 1991년부터 그린 〈제유법>은 그의 회화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가로 25.4센티미터, 세로 20.3센티미터 크기의 판 수백개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판이 한 가지 톤의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모든 판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언뜻 보면 비슷한 색으로 구성된 모노크롬 회화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그냥 색이 아니다. 이 색들은 작가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작가가 재현해낸 그들의 피부색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다양한 인종과 섞여 미국에서 자란 작가의 다문화적인 정체성과 개인사가 작업에 고스란히 드러난다.75-1
h-2.오스카 산틸란의 <침략자The Intruder〉(2015)에서도 관념의 세계와 실제 세계가 만나는 순간이 있다. 산틸란은 영국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대략 3센티미터 크기의 돌을 하나 주워와서는 영국을 아주 미세하게 줄였다고 말했다. 이 작은 제스처는 영국에서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부정적 반응의 원인은 작가가 자연을 훼손했다라기보다는 감히 영국의 크기를 줄였다는 데 있었던 것 같다.75-2
1.현대성의 위기와 건축의 파노라마, 탈 카미너(Tahl Kaminer) 저, 조순익 역, 서울 시공문화사
2.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의 사람들(미래의 고고학자편), 히메네스 라이(Jimenez Lai) 저, 김윤범 역, 픽셀하우스
3.이십세기 집합주택, 근대 공동주거 백 년의 역사, 손세관 저, 열화당
4.롤랑바르트 평전 & 텍스트의 즐거움(Le)plaisir du texte, 롤랑 바르트(Rolan Barthes) 저, 김희영 역, 동문선
5.김종성 구술집, 채록연구 최원준, 전봉희, 우동선, 남성택, 마티
6.오늘의 건축을 규명하다-건축의 현재 상태에 대한 상세설명, 자크 뤼캉(Jacque Lucan) 저, 남성택 역, 스페이스 타임
7.초현실주의 미술, S.알렉산드리안 저, 이대일 역, 열화당
8.사진이란 이름의 욕망 기계, 장정민 저, IANN BOOKS
9.아돌프 로스의 건축예술, 아돌프 로스 저, 오공훈 역, 안그라픽스
10.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저, 정기수 역, 민음사
11.귀불, 박용규저 , 서울문화인쇄
12.사로잡힌 돌, 김영글 저
13.인터페이스 연대기, 박해천 저, 디자인플럭스
13-1.디자인의 모델링 인터페이스: 투시도법과 CAD프로그램
13-2.스크린, 디자인의 숭고한 대상
14.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올라브 하우게 저, 임선기 역, 봄날의 책(세계시인선 1)
15.우주 감각 NASA 57년의 이미지들, 이영준 저, 워크룸 프레스
16.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정영문 저, 워크룸 프레스
17.negotiating ungers the aesthetics of sustainability the solar house, common room
18.파르마코-AI, K 알라도맥다월 & GPT-3 저, 이계성 역, 작업실유령
19.미륵-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 요헨 힐트만 저, 이경재, 위상복, 김경연 역, 학고재
20.예술적 원칙에 따른 도시설계, 카밀로 지테 저, 김기준 역, 미진사
21.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아빌리파이, 매드프라이드, 그리고 화학적 사이보그>, 유기훈 저, 이음
22.정크스페이스, 렘 콜하스 저, 임경규 역, 문학과 지성사
23.오프모던의 건축, 스베틀라나 보임 저, 김수환 역, 문학과 지성사
24.아키라우터 3권-건축의 도시, 도시도 건축이다, 남성택 저, 한양대학교 출판부
25.Pier Vittorio Aureli,Interviewed by 0300TV-DOGMA, representation as a channel for creativity, ARQ ediciones
26.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김인순 역, 열린책들
27.라마와의 랑데부, 아서 C.클라크 저, 박성준 역, 아작
28.Axt 050+1호, (주)은행나무출판사
29.건축과 기후윤리, 백진 저, 김한영 역, 이유출판
30.비참조적 건축, 발레리오 올지아티&마르쿠스 브아리트슈미트 저, 강신&박하윤 역, Hoi-publishing
31&32.무기여 잘 있거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김성곤 역, 시공사&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장결렬 역, 시공사
33.눈먼 갤러리스트, 요한 쾨닉 저, 이보영 역, 열화당
34.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저, 유숙자 역, 문학과 지성사
35.DOGMA LIVING AND WORKING, Pier Vittorio Aureli and Martino Tattara, MIT Press
36.OPPOSITIONS-On Typology, Rafael Moneo, MIT Press
37.도서관 환상들, 아나소피 스프링어 & 에티엔 튀르팽 저, 김이재 역, 만일
37-1.리딩 룸 리딩 머신
37-2.앤드루 노먼 윌슨:스캡옵스(ScanOps) 2012-2014
38.건축의 외부공간, 아시하라 요시노부 저, 김정동 역, 기문당
39.불타는 유토피아, 안진국 저, 갈무리
39-1.1부 낮달 / 39-2.2부 미래의 침묵 / 39-3.3부 둔갑술 / 39-4.4부 불면증
40.아주까리 수첩-조성룡 우리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건축과 풍화 urban weathering, 심세중 역, 수류산방
41.몸부림 메뉴스크립트 04: 알바 알토-건축의 인간화(테크놀로지 리뷰 1940년 11월호), 에로시스
42.휴먼스케일, 고나무, 김형진, 노정태, 박해천, 배홍철, 복도훈, 윤원화, 현시원 저, 워크룸 프레스&일민미술관
43.서울선언: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 김시덕 저, 열린 책들
44.우리는 인간인가? 디자인-인간의 고고학, 베아트리츠 콜로미나 & 마크 위글리 저, 정현우 역, 미진사
45.은엉겅퀴 , 라이너 쿤테 저, 전영애 박세인 역, 봄날의 책 中 서울의 선교(mission in seoul)
46.리서치란 무엇인가 , 피터 밀러 저, 박유선 박지윤 역, 플레인앤버티컬
47.건축잡지 미로[1] 참조와 인용 2024 가을 / 겨울
47-1.자기 참조 이후의 건축, 김광수 저
47-2.공간 디자인에서 시간 디자인으로-현대 건축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 송률, 크리스티안 슈바이처 저
48.사진의 털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저, 씨네북스
49.납치된 도시에서 길찾기, 전현우 저, 민음사
50.페터 춤토르 분위기, 페터 춤토르 저, 장택수 역, 박창현 감수, 나무생각
51.Poul Kjaerholm, 아넥스
52.별의 시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저, 민승남 역, 암실문고
53.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이설희, 야코브 파브리시우스, 기혜경, 장지한, 한스 올리히 오브리스트, 워크룸프레스
54.스코어 스코어, 오민 저, 작업실 유령
55.피로사회, 한병철 저, 김태환 역, 문학과 지성사
56.건축평단 26 <기획: 설계 스튜디오 2025>, 제대로 랩
56-1.이희준 서문:입장들(Positions)
56-2.현실 가르치기_니콜라 도르발-보리 Teaching Reality_Nicolas Dorval-Bory
56-3.연속적인 짓기-건물들 그리고 불연속적인 주변부에 관하여_안드레아스 레흐너 Continual Building-On Buildings and Discontinuous Peripheries_Andreas Lechner
57.심리스(seamless), uk sunwoo
58.초예술 토머슨, 아카세가와 겐페이 저, 서하나 역, 안그라픽스
59.코,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저, 오정석 역, 더클래식
60.게임 코러스, 영이 저, 워크룸프레스
61.PINK:Published In North Korea, 컨셉/안무 정다슬, 권태현 큐레이션 & 무용보읽기:사단장과 전사들, 컨셉/안무 정다슬, 권태현 큐레이션
62.오염의 시대: 세계 혹은 세상의 끝에서, 이한범 저, 아넥스
63.동물의 지위 변화와 도시 성원권 문제: ‘거리 홈리스의 개’ 문제를 중심으로, 박주현 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24학년도 석사학위 청구논문
64.Dixit 03 Nature morte/Still life, Richard Venlet OFFICE Kersten Geers David Van Severen, Caryatide
65.포에버리즘, 그래프턴 태너 저, 김괜저 역, 워크룸 프레스
66.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저, 김은모 역, 문학동네
67.일본 현대 디자인사, 우치다 시게루 저, 노유니아 역, 소명출판
68.동시, 오민 엮음, 작업실 유령
68-1.동시-접합
68-2.동시-집합
68-3.동시-콘퍼런스
68-4.동시-인터뷰1
68-5.동시-인터뷰2
69.유령과 기계의 암투, uk sunwoo
70.A BOOK OF ARNE JACOBSEN, 아넥스
71.몸짓들, 빌렘 플루서, 안규철 역, 김남수 감수, 워크룸 프레스
72.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the Weird and the eerie, 마크 피셔 저, 안현주 역, 구픽
73.바틀비 혹은 우연성에 관하여, 조르조 아감벤 저, 양창렬 역, 현실문화
74.울림들 KLÄNGE, 바실라 칸딘스키 저, 도요와 호반세 역, 텍스트 프레스
75.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박보나 저, 바다출판사
75-1.더 시끄럽게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바이런 킴
75-2.실재는 무한하다, 오스카 산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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